6·25는 누굴 위한 전쟁? 속 보인다 속 보여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 만에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큼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을 한 가지 선택하고 선정 기준과 이유를 서술하시오.’
영화 <최종면접> 한 장면.
위는 해태제과 채용 에세이, 아래는 현대자동차 인적성시험(HMAT) 역사 에세이 주제다. 국정교과서 관련 이념논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런 문제를 두고 기업 채용단계에서도 ‘사상검증’을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해태에 지원한 이 아무개 씨(27)는 “복거일의 책을 읽고 쓰라는 건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라고 불평했다. 복거일 씨는 대표적인 보수 성향 소설가로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영어 공용화’를 제안하고 원화 대신 달러를 통화로 채택하자는 주장을 해 논란이 일었다.
해태 측은 “젊은 세대들에게 6·25라는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며 “에세이 주제 역시 채용 시기마다 바뀐다.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6·25를 알리고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역사 에세이로 화제가 된 현대차에 지원한 박 아무개 씨(25)는 “경제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을 떠올릴 것”이라며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찬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문제 제출자나 채점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하기에 회사 내에도 정보가 없다”며 관련 답변을 거부했다.
기업 채용 과정에서의 ‘사상검증’ 의혹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2013년에는 이랜드그룹 채용 적성검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궁극적인 책임은 정부와 검찰에 있다’라는 ‘○×’문제를 냈고 IT회사 조택코리아는 지원 자격에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할 것’이라고 명시해 파문이 일었다. 또한 지난해에는 일부 방송사가 면접에서 정치 성향이나 종북세력에 대한 의견을 물어봐 문제가 됐다.
사기업뿐 아니라 국가기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난 9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채용 이력서에 정당 활동을 기재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서기호 정의당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특정 정당 경력만으로 사상검증을 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헌재 측은 당시 “대상자의 정당 가입과 탈퇴에 대해 알아보려 했던 것이 아니다”라며 “다방면에서의 활동 내용을 폭넓게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5월에는 경력 판사 임용에 지원한 변호사들이 사상검증이나 다름없는 국정원의 신원조사를 받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이 지원자들을 상대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견해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활동을 추궁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성명을 통해 “법조계의 일원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개인의 정치 성향 등을 질문하는 것 자체로는 법적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채용에 반영이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직자로서는 채용에 반영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시민사회단체 새사회연대는 “기업 입사 지원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입사 결과에 반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회인권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당연히 사상 양심에 대한 침해”라며 “국가기관인 국정원에서조차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 사회 전반적으로 이념에 대한 질문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형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