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속도’는 한국에 두고 오세요
<1> 깔로 트레킹 코스에서 들를 수 있는 산속 부족마을. <2> 마을 입구 어디에나 있는 물항아리. 남을 배려하는 미얀마 사람의 오랜 관습이다. <3> 깔로 트레킹이 끝나는 곳에 넓디넓은 인레 호수가 펼쳐져 있다.
여주인공 미밍은 사랑하는 한 남자를 50년간 기다립니다. 자연 속에서 두 사람의 순수한 유년의 사랑. 심장의 박동소리마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을 수 있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한번쯤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읽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전 지금 이 소설의 무대 깔로(Kalaw)에 있습니다. 미얀마 중부 산골마을입니다. 깔로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한국서 얼마 전 번역된 이 소설을 가져와 여기서 읽으니 느낌이 다릅니다. 반바지에 헐렁한 배낭을 메고 양곤에서 고속버스로 10시간을 달려왔습니다. 여긴 해발 1300미터가 넘는 지역이라 선선합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의 휴양지로 알려진 이곳. 지금은 유럽사람들이 즐겨찾는 트레킹 코스입니다. 한마디로 황톳빛으로 채색된 마을입니다. 트레킹 코스는 깔로-인레호수-낭쉐로 이어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톳빛 길.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넓디넓은 인레호수가 펼쳐집니다.
혼자 이 길고 가느다란 황톳빛 숲길을 걸어갑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가고 싶지 않은 길도 있지만 ‘가지 않은 길’(Not taken Road 프루스트의 시 제목)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삶의 갖가지 짐이 많은 사람은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지 않은 길’이 얼마나 많을까요? 깔로에서 싱글 7 달러짜리 레일로드 호텔에 짐을 풉니다. 저렴하지만 깔끔한 목조 숙소입니다. 유럽 젊은이들이 넘쳐납니다. 오늘 체크인한 방명록을 보니 네덜란드, 독일, 영국, 멀리 칠레에서도 왔네요. 한국 젊은이들은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남부인 양곤에서 중부지방 깔로까지 오려면 저녁에 고속버스를 타고 새벽에 내리게 됩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넓은 나라인지라 고속버스가 오후에 떠나 새벽에 도착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10시간에서 14시간 걸리는 도시가 많습니다. 모두 차안에서 하룻밤을 잡니다. 정차하는 곳도 없어, 용변을 보려고 차를 세우면 고속도로변에 세워줍니다. 긴 이동시간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며 저도 어느 날 결심을 했습니다. 시간과 속도를 아예 내려놓자, 현지인처럼 살고자 한다면 시간과 속도를 아예 버리자. 또 하나의 사랑할 나라니까요. 제 안에는 너무나 빠른 ‘한국의 시간과 속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깔로의 산속마을에는 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깊은 산속인데도 마을 입구에는 ‘물항아리’가 있습니다. 길 가는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라고 전국 어디든 길가에 놓여있는 물항아리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미얀마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깔로의 재래시장에는 소설 속에 묘사된 것처럼 갖가지 채소, 열대과일, 공예품, 손으로 말아 만든 잎담배들을 팝니다.
깔로의 여인 미밍이 잎담배를 말며 기다리던 그 기나긴 시간과, 뉴욕 맨해튼에서 성공의 속도 속에 산 한 남자가 죽을 때야 서로 만난 깔로. 깔로는 오늘도 고즈넉하기만 합니다.
아빠를 찾아 나선 딸은 이곳에서 ‘깔로의 연인’들이 함께했던 유칼립투스 나무와 노란 프리지아 꽃의 향긋한 냄새를 기억하며, 사랑과 기다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정선교 Mecc 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고아를 위한 NGO Mecc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