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제대로 못한다 했더니…
‘순한 양’과 ‘센 언니’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고 공언한 김무성 대표가 지나치게 ‘저자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김 대표가 청와대에 약점을 잡힌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7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뒤 김 대표의 안내를 받으며 퇴장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이는 특정 정치인을 표적으로 진행한 사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불가피하다. 더군다나 김 대표는 여권의 유력 차기 주자이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는 줄곧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정치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친박 핵심부의 이러한 물밑 움직임이 최근 박 대통령을 대하는 김 대표의 ‘저자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근 여의도에선 김무성 대표의 ‘변신’이 연일 화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년 총선 공천 룰을 둘러싸고 박근혜 대통령과 전면전을 벌일 것만 같던 김 대표가 돌연 스탠스를 바꾼 까닭에서다. 지난 10월 29일 경북 포항에서 열린 당 내부 행사에서의 발언은 그 정점을 찍었다.
김 대표는 “앞으로 박 대통령만큼 개혁적인 대통령은 나오기 힘들다. 내가 박 대통령 개혁의 선두에 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 임기가 2년 반도 남지 않았다. 보통 임기 중반이 지나면 레임덕이 와 대통령이 힘 빠지는데 걱정하지 말라. 내가 박 대통령 개혁의 선두에 서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레임덕이 없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 발언을 들은 정치권 관계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어리둥절했다.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를 둘러싸고 벌어진 친박계와의 공천 전쟁에서 “앞으론 더 이상 참지 않겠다”며 서슬 퍼런 목소리를 냈던 김 대표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후 김 대표가 다소 한 발 물러선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조만간 박 대통령과의 일전이 불가피할 것이란 게 정가의 우세한 전망이었다.
김 대표를 따르는 비박계의 한 의원은 “김 대표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 쪽 역시 친박과의 전쟁을 대비해서 전투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사실상 김 대표가 ‘백기’를 던진 것 같다. 갑자기 김 대표가 입장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김 대표가 전략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그 중 하나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끄는 여권의 ‘역사 전쟁’이 내년 총선에 정치적 운명을 걸어야 할 김 대표로선 나쁘지 않은 프레임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국정교과서 문제가 당장은 여권의 지지율 하락을 가져올진 몰라도 결국 선거 국면에선 보수표 결집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노동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여권은 장기적으로 총선과 대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가 적극적으로 역사 전쟁 선봉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YS) 밑에서 ‘보스 정치’를 배운 김 대표의 태생적 한계를 거론하며 박 대통령에게 결국 고개를 숙였다는 말도 들린다.
정치권에선 또한 김 대표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일요신문>은 김 대표 입장에선 찜찜할 수밖에 없는 은밀한 움직임이 친박 핵심부 내에서 이뤄진 정황을 포착했다.
복수의 사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해 10월경부터 김 대표와 관련된 파일이 대거 수집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대표의 중국 상하이발 개헌론 발언으로 친박과 비박 간 대립이 고조됐던 무렵이다. 이를 전후로 지금까지 김 대표에겐 악재가 연이어 터졌다. 장녀의 특혜 임용 논란, 사위 마약 사건, 부친 친일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김 대표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당 대표 취임 이후 승승장구하던 김 대표의 지지율은 여러 차례 도마에 오르면서 상승 추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 안팎에선 김 대표와 관련된 내용들이 핵심 친박계 인사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는 말이 나돈 바 있다. 김 대표를 못마땅해 하는 친박이 의도적으로 언론 등에 공개했을 것이란 얘기다. 앞서의 김 대표 측 비박계 의원도 “솔직히 사정기관 협조가 없었다면 알기 어려운 파일들이 더러 있다. 김 대표가 아무리 맷집이 강해도 연타를 맞으면 버틸 수 없다. 김 대표를 흠집 내기 위해 친박 쪽에서 ‘작업’을 한 것 아니냐는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친박계 의원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친박 핵심부가 김 대표 파일을 확보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러한 의구심을 일축만 하기엔 무리가 있다. 김 대표가 당시 금기시됐던 개헌 발언으로 박 대통령 ‘심기’를 어지럽힌 직후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을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대표 파일은 ‘투 트랙’으로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부 사정당국이 자체적으로 또는 사정기관들을 통해 올라온 김 대표 관련 보고 중 신빙성 있는 것들만 추린 뒤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또 친박계가 주도하는 정무라인에서도 여의도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김 대표 동향들을 모았다고 한다. 사정 쪽이 첩보를 맡았다면 정무 파트가 소문들을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엔 지금까지 드러난 것 외에도 ‘파괴력’ 있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 업무에 관여했던 한 사정기관 인사는 “상부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김 대표와 관련된 내용만 집중적으로 팠다. 사정당국이 나선 것인데 시중에 도는 ‘찌라시’ 수준은 아니지 않겠느냐. 김 대표 입장에선 민감해 할 내용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털어놨다.
해당 과정을 누가 진두지휘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하지가 않다. <일요신문> 취재 역시 이 부분에서 진통을 겪었다. 다만, ‘김무성 보고서’가 몇몇 친박 인사에게 건네졌다는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김 대표 파일 수집에 친박계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 멘토 그룹의 한 친박 원로는 “김무성 파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또 실제로 일부 내용도 봤다. 친박 쪽에서 한 일이라고 들었다”면서 “김 대표가 알면 상당히 기분 나빠할 것이다.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다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되물었다.
과거 노무현 정권 등에서도 근무했던 사정당국 고위 인사 역시 “MB(이명박) 정권 시절 정치인 사찰을 연상시킨다. 특정 정치인을 상대로 이런 조사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내가 재직 시엔 이런 경험은 없었다. 명확한 비위 사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표적 수사라고 봐도 무방해 보인다. 야당이라면 가만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한 목소리로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김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런 식으로 조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공적 기관이 사적인 목적에 의해 움직였다면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MB 정권 때처럼 특정 세력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 진영에선 불만을 쏟아냈다. 비박계의 또 다른 의원은 “김 대표를 주저앉히려 약점을 모았던 것 아니겠느냐. 최근 김 대표가 주춤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공포정치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한편에선 다른 해석도 있다. 친박 핵심부가 차기 주자로서의 김 대표 입지를 인정하되 ‘보험용’으로 파일을 모았을 것이란 얘기다. 앞서의 친박 원로는 “아무리 김 대표가 밉더라도 집권여당 대표고, 또 현실적으로 유력한 차기 주자다. 임기가 후반기로 치닫고 있는 박 대통령 역시 이대로라면 김 대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김무성 파일 중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퇴임 후를 대비해 깊숙한 금고에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친박 핵심 쪽에서 이를 무기로 김 대표 와 ‘딜’에 나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