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가기관 짬짜미 그곳에도 ‘정경유착’이…
지난해 5월 15일 북한 평양에서 발생한 고층 아파트 붕괴사고는 날림공사로 인한 후진국형 안전사고였다. 사진은 평양 거리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공동취재단
필자가 이번 연재를 통해 지난해 평양에서 발생한 고층 아파트 붕괴사고와 관련한 내막을 공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지닌 의미가 우리의 ‘세월호 침몰’ 사고만큼이나 상당히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희생자 규모만 따진다면, 오히려 세월호보다 더 컸다. 그것도 북한의 중심인 수도 평양 한복판에서 발생한 까닭에 파급력은 상당했다. 사고 장소 길 건너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숙박하는 서산호텔을 마주하고 있기에 숨길 수조차 없었다.
김정일은 2009년, 평양 10만 호 건설 사업을 본격화했다. 2012년 강성대국 완성의 해를 앞두고 평양 내 노후주택을 허물고, 새로운 주택 10만 호를 재건축하여 도시정비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후계세습을 앞두고 있던 자신의 아들 김정은의 치적사업 성격이 매우 강했다.
시작부터 무리수였다.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자본력이 전무했다. 믿을 것이라곤 북한식 속도전과 자력갱생 정신이 전부였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때부터 평양 곳곳은 건설 붐이 일었지만, 대부분 진행된 공사는 날림의 연속이었고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평양 주민들은 새롭게 건설된 아파트보단 오히려 20~30년 전 지어진 주택을 선호할 정도였다. 심지어 당시 후계자 김정은의 측근들 사이에서도 ‘10만 호 건설은 무리다. 평양을 중심으로 기껏해야 초반 4만 호, 이후 김정일이 사망하고 나서는 2만 호 정도만 건설하겠다’는 반발이 내적으로 발로될 정도였다.
북한의 고위급 간부가 아파트 붕괴로 수백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사진출처=조선중앙방송
사회주의 국가라고 자처하는 북한의 주택건설 사업은 군과 당 및 내각 등의 국가기관이 직접 시행 및 시공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국내처럼 사적영역의 전문건설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이 문제였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내부에선 자연스레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하나둘 붕괴됐다. 전사회적 공평한 주택공급은 고어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음지적인 돈주(전주·錢主)들의 시장경제가 대신했다. 이에 북한에서도 정경유착으로 떼돈을 벌어대는 자본계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 북한의 건설 사업은 각 주요 기관이 담당하지만, 그 자본을 대는 곳은 새롭게 등장한 자본계층과 중국의 자본가들이다.
이러한 ‘민간자본’이 들어간 주택들은 응당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 적은 원가로 공사하길 바란다. 이를 위해 결국 규정을 어기고 철근 등 자재 함량을 적게 넣거나, 불량 자재를 사용하게 된다. 공사를 책임지는 각 기관 관계자들은 이를 눈감고 뇌물을 받아먹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또한 공사에 참여해 건설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물론 주변 주민들까지 ‘어떻게 하면 자재들을 도둑질하여 한몫 챙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현재 북한 건설시장이다.
2014년 5월 15일,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1동에서 발생한 당시 아파트 붕괴사고 역시 비슷한 원인이었다. 해당 공사는 2011년 착공됐고, 한국의 경찰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 내 7총국이 허가를 받아 주요 간부들의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7총국은 인민보안부 내 일명 공병총국이라고도 불리는 대형 건설사업 담당부서다. 총 인원이 15만 정도.
앞서 말했지만, 북한은 민간 건설사가 없기 때문에 군과 당 각 기관에선 이러한 건설 사업부를 운영하며 크고 작은 건설 사업을 벌인다. 그중 인민보안부 7총국은 북한 내 가장 큰 건설 사업부에 속한다. 참고로 현대가 투자해 건설한 ‘정주영체육관’도 7총국이 직접 맡아 시공했다.
당시 무너진 아파트는 23층 높이로 건설 중이었다. 세대수만 92세대. 공사기획부터 잘못됐다. 건설 책임은 7총국이었지만, 이 자본을 댄 전주(錢主)는 리 아무개(40대)라는 여성 신흥자본가였다. 필자가 입수한 내부 자료에 따르면, 리 씨의 남편은 국가안전보위부의 한 부서국장을 맡고 있는 고위급 인사였다. 리 씨는 남편의 권력을 밑천삼아 여러 사업을 벌여 자본을 모았고, 이 자본을 토대로 평양 내 건설 붐이 일자 여러 이윤을 전제로 투자에 나섰던 모양이었다.
계약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리 씨는 아파트 건설에 필요한 자본금 100만 달러 이상을 댔다. 리 씨는 92세대 중 50%의 입주권을, 7총국이 40%, 나머지 10%는 평양시 평천구역 당 및 행정 기관이 가져가기로 했다. 본래 북한은 주택 거래가 법으로 보장돼있지 않지만, 이른바 지하 시장경제가 자리한 이후 주택 거래가 공공연하게 됐다. 리 씨는 자신이 쥔 입주권으로 분양사업을 벌일 예정이었다. 7총국은 40%의 입주권을 쥐고 직원들이 들어갈 예정이었고 인력을 대는 것으로 합의했던 것.
붕괴 원인은 역시 날림공사. 사고 직후 국방위원회 설계국 및 상무국, 내각 건설감독성의 합동조사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해당 아파트는 기존 설계안(20층)보다 3층을 증축했으며, 철근 규정량은 3분의 1 수준만 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시멘트조차 북한산 고강도 시멘트(주로 상원 시멘트공장과 순천 시멘트공장서 생산) 대신 중국의 불량 시멘트로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규정미달 자재공사가 가능했던 것은 북한 경제의 저질운영체제가 빚어낸 원인이기도 하지만 상급감독기관이 이를 눈감고 뇌물을 받는 상납구조 탓이 크다. 실제 7총국의 건설공사인 경우 대부분 감독기관들은 적당히 뒷돈을 받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여 그해 5월 15일 사단이 났다. 오후 6시경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분진을 쏟아내며 아파트가 힘없이 무너졌다. 인테리어 공사용 모래와 자갈이 건물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4층 동쪽 측면 안방에서부터 균열이 발생했다. 붕괴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정일이 2009년 김정은 치적 사업 성격으로 평양 10만 호 건설을 본격화했다. 연합뉴스
북한에선 완공 이전 대부분 입주민들이 주택에 입주하는 문화가 있다. 아예 기관이 건축물의 뼈대 및 외장 건설을 마치면, 입주민 스스로 내장 공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 아파트에는 이미 많은 주민들이 입주한 상황이었고, 일반 건설전문 노동자, 7총국 소속 성원, 집들이 하객까지 건물 내에 수백 명이 있었다.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붕괴사고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만 무려 450~500여명에 달했다고. 북한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사실상 지난 2009년부터 본격화된 날림식 ‘조선속도’ 건설사업의 부작용이었다. 당시 사고는 그 결정판이었다.
김정은 역시 상당히 놀랐다. 문제는 현장이 평양 한복판이었다는 점. 만약 해당 사고가 지방에서 벌어졌다면,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까지 노출되는 평양에서 이를 감추기는 불가능했다. 사고 직후 김정은은 “1주일 내 잔해 정리 등 사고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라”는 최고사령관 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7총국은 시신 발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곧바로 중장비를 투입했다. 잔해 제거를 하면서 발견된 손·발 등 일부 신체들을 평양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운 좋게 시신 일부라도 찾은 유가족들은 신원을 확인하고 챙겨갔을 뿐, 상당수는 시신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김정은도 이례적으로 즉각 민심달래기에 나섰다. 그해 1~2월에 있었던 장성택 숙청 관련해 인민보안부 주요부서의 주요 핵심간부들과 가족들까지 정치범 혹은 실직돼 지방으로 추방된 까닭에 평양민심이 뒤숭숭했다. 김정은 지시로 유가족들을 위해 합동장례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당 재정경리부 주도로 금전을 모금했다. 그렇게 사망자 1인당 약 3000달러 정도의 적잖은 위로금을 지급했다. 여기에 다시 건설해 입주한 각 가구에 약 9000달러에 달하는 내부 인테리어 비용도 무상으로 지급했다.
또한 사건 직후 김정은은 총책임자인 최부일 인민보안부장, 선우형철 7총국장, 평양시 인민위원회 차희림 위원장, 평천구역 당 리영식 책임비서 등을 앞세우고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이 장면은 당시 북한 언론들에 의해 대서특필됐다. 물론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은 대장 직급에서 중장으로 강등되됐다. 이후에 알려졌지만, 선우형철 국장과 7총국의 정치위원은 곧바로 해임됐다. 차희림은 큰 화를 면했지만 평천구역 당 리영식 책임비서는 좌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운 사실은 정작 불량자재를 대고 뇌물을 먹인 전주 리 씨는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는 것. 리 씨는 사고 직후 부랴부랴 남편을 통해 사건의 검열 및 인사를 담당한 조직지도부 관련자들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후문이다. 이로 인해, 사고 배경과 원인에 관한 보고자료 상당 부분이 누락됐다. 김정은은 이 자료만을 보고받았다고.
하여튼 베일 속에 가려져있던 이 끔찍한 사고는 결국 김정은 후계체제를 위한 무리한 치적사업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한편으론 소위 속도전 혹은 조선속도(마식령속도) 등 정치적 구호만 연발하는 북한의 현 경제내부 상황과 건설과정의 문제점도 지적된다. 또한 사고 직후 후속처리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이제 막 어설피 자리 잡기 시작한 후진적 시장경제가 북한 내에서 어떤 식으로 부작용을 야기하는지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최부일 인민보안부장 사고 내고 건재한 까닭? 미래의 총참모장 꼽힌 ‘실세’ 2014년 5월 붕괴사고가 발생한 아파트 건설의 책임기관은 인민보안부 7총국이었다. 뇌물로 김정은에게 올라갈 보고서 일부 내용을 누락시킨 전주 리 아무개 씨는 둘째 치고, 어떻게 총책임자인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은 건재했던 것일까. 2012년 4월 15일 열병지휘관 최부일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 리영호 총참모장에게 열병 보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 부장은 당시 사고로 인해 중장으로 강등됐지만, 목숨은 물론 보안부장 자리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최근 그는 다시금 대장으로 복귀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김정은이 최부일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최부일은 정통 군 지휘관 출신이다. 오랜 기간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으로 있었다. 그는 총참모부 시절, 군 연례행사 중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지는 ‘열병식’ 지휘관을 맡기도 했다. 북한 열병식의 총책은 대개 미래의 총참모장이 맡는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최부일은 군 시절 매우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2010년 9월, 김경희, 김정은, 최룡해 등이 대장 계급을 달았을 때 함께 대장으로 진급한 실세 인사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미래의 총참모장으로까지 뽑혔던 최부일을 2013년 인민보안부장에 앉힌 것은 선친 김정일의 복안으로 보인다. 인민보안부장에 이러한 거물급 인사를 앉힌 데에는 그 만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내에서 인민보안부의 위치는 앞서 살펴본 정찰총국, 국가안전보위부 등과 비교해 그다지 월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낮으면 낮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해진 지금 북한의 사정을 놓고 보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경제적 영역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북한에서 인민보안부의 위치도 상승될 소지가 높다. 인민보안부의 성원은 전국 7총국과 8총국(7만~8여 만 명이며 일명 도로총국이라고 부름), 23총국(평양시 지하철 담당 대략 1만 5천여 명) 등 무려 30여 만 명에 달한다. 한국의 지구대 개념에서 더 나아가, 보안부 소속 보안원은 일개 농장과 기업소까지 전부 파견을 나가 있다. 특히 보안부는 일선의 경제감(사)찰에 강하다. 이 과정에서 보안원들은 제법 쏠쏠한 뇌물을 챙긴다. 즉, 인민보안부를 지탱하고 실권을 챙길 수 있는 부분은 이러한 경제사찰에서 비롯된 ‘돈 뭉치’다. 여기에 김정은 시대 인민보안부 조직 내에서 유의미하게 살펴볼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종의 전투경찰이 창설돼 운영 중이란 사실. 2010년 4월, 보안부 내 창설된 ‘조선인민내무군’은 현재 도 단위로 운영되며 각종 시위 현장진압 임무를 수행한다. 이는 현재 김정은 시대 통제력에 이상이 감지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지난 연재에서 잠시 밝혔듯, 현재 북한에서도 (음지적 수준이지만) 반체제 활동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투경찰 등장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현재 조선인민내무군은 주로 화재 나 시장 불만 및 소요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주변을 통제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지만, 언제든 반체제 시위가 발생한다면 곧바로 투입될 부대라 할 수 있다. [걸] |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