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악마로 만들지 않으려 아들과 싸운다”
10월 28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정 씨와 마주 앉았다. 정 씨는 장녀 박선희 씨와 함께 나와 그간의 심경을 밝혔다. 검은 라운드 니트에 검정색 재킷을 입고 화장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예금 자산만 550억 원이 넘는 회장의 ‘사모님’이라고 하기엔 수수한 차림이었다. 니트 안쪽으로 왼쪽 어깨에 붙인 파스가 언뜻 내보였다. 입을 열기 전부터 정 씨의 눈시울은 젖어 있었다. 가장 처음 뱉은 말은 “억울하다”였다. 두 시간 반을 이어진 인터뷰 내내 정 씨는 여러 번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훔쳤다. 다음은 정 씨와의 일문일답.
아들과 재산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박만송 삼화제분 회장의 부인 정상례 씨는 “아들이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길 바란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억울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가만히 있으면 진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회장님(박만송 회장) 보면서 ‘이대로 가시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어떻게든 일을 잘 마무리 짓고 회장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 회장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나와 딸이 아침 7시에 나와서 정오까지 병원에 있다가 집에 잠시 들어가서 쉰다. 그리고 다시 4시쯤 나와서 7시~8시쯤 집에 들어간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으니 간병인들이 많이 힘들어한다. 내 건강이 상했을 땐 어쩔 수 없지만, 힘닿는 데까지 간병하려고 한다.”
―쓰러지기 전 박 회장의 건강상태는 어땠나.
“항상 건강하다가 2010년도부터 급격히 나빠졌다. 스스로 기억력이 많이 감퇴한다고 해서 강남 세브란스 병원 정신과를 찾았다. 노인성 우울증과 경증 치매 진단을 받았다. 워낙 자존심이 센 분이라 행동 흐트러지는 것을 스스로 못 참아 했다. 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느끼면 오히려 화를 냈다.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병원에서 준 약을 쓰레기통에 모두 버리기도 했다. 남편이 감당이 안 돼 딸(장녀)을 자주 불러서 남편을 달랬다.”
―박 회장이 쓰러진 날 얘기부터 듣고 싶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도 양쪽의 의견이 상당히 다르다. 아들 박원석 대표는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게 된 건 당시 어머니와 누나가 쓰러진 아버지를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던데.
“너무너무 기가 찬다”며 말을 잇지 못하는 정 씨를 대신해 딸 선희 씨가 말을 받았다. “2012년 9월 8일이었다. 살이 지속적으로 빠지고, 배가 아프다고 하셔서 9월 6일에 영동 세브란스(강남 세브란스 병원)를 찾았다. 그리고 병원에 있기 답답하다고 하셔서 일주일 동안 입원했어야 하는데 다음 날인 7일에 퇴원했다. 바로 그날 밤에 화장실 갔다가 나오시면서 넘어지신 거다. 쓰러지신 직후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과 말이 정상이었다. 다만 이마에 약간 상처가 나 ‘혹시 모르니 날 밝으면 병원 가보자’고 아버지께 얘기하고 주무시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힘이 없어 하시기에 어머니께 ‘아빠 병원 모시고 가자’고 했다. 부축해 차에 태울 사람이 필요해 원석이를 불렀다. (박원석 대표가) 와서도 업고 내려갈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냥 119 부르자’고 해서 구급차로 이동했다. 유기치상죄로 형사고발 했던데 말이 안 된다. 그럴 거면 그 당시에 바로 신고하지 왜 이제 와서 그러나.”
다만 “뇌출혈 때 박 회장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며 정 씨를 고소한 것은 박 회장의 여자 형제들이다. 박 회장에겐 한 명의 누나와 6명의 여동생 등 7명의 여자 형제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5명이 정 씨를 유기치상 및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삼화제분 전경.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박만송 회장이 1997년에 박원석 대표에게 잠시 회사를 맡긴 적도 있지 않나. 외아들인 데다가 경영일선에 관계한 건 박 대표 하나뿐이니 박 회장이 아들에게 원래 회사를 맡기려고 했던 건 아닌가.
“당시 처음 회사를 맡겼다가 된통 당해서 (박 대표를) 쫓아냈다. 이후 아이들 고모부가 회사를 경영했다. 그간에도 아버지 모르게 회사를 차렸다가 부도를 내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남편과 나, 우리 집 남자애(박 대표)와 관계가 틀어졌다. 회사를 맡길 사람이 없으니 회장님이 큰아이에게 회사를 맡으라고 여러 번 말했다. 큰애는 차라리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시라고 조언했다.”
―한국투자저축은행, 하나은행, 주주권 소송 등 걸려있는 대부분의 소송에서 인감이 위조됐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다. 박 대표는 비슷한 도장이 원래부터 두 개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녀들 인감을 모두 자신이 관리했던 분이다. 지방에 내려가거나 오래 자리를 비울 때는 내게 맡겼다. 인감만 있으면 그간 모아둔 모든 걸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이 상식적으로 인감을 똑같은 걸로 두 개 만들었겠나. 회장님이 쓰던 인감은 20년 가까이 써서 한 귀퉁이가 떨어진 상아 도장이었다. 감정을 통해 확인한 위조 도장은 고무인으로 똑같이 한 귀퉁이가 떨어진 것처럼 파놨더라. 원래 두 개였다면 뭐 하러 그런 식으로 복제했겠나.”
이에 대해 박원석 대표는 “아버지가 직접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비슷한 도장이 두 개여서 감정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인감 위조는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삼화제분 홈페이지 메인 화면 캡처
―박 대표가 박 회장, 가족 소유 건물과 땅을 담보로 대출을 일으킨 게 600억 원대 맞나.
“소송 중인 것만 그 정도다.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돈 만져보지도 못했다. 회장님은 빚지는 게 싫어서 평소 자녀들에게도 카드 만들지 말라고 교육했다. 시장에서 산 5000원짜리 신발을 다 해질 때까지 신고 다니던 분이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서 성실납세자상도 받았다. 그런 분이 제2금융권에서만 60억 넘는 돈을 빚질 리 있겠나.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다른 사람이 진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었다. 내 마음이 정말……(울먹).”
―뇌출혈로 박만송 회장이 쓰러지고 몇 번의 수술 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 그간 박 대표가 여러 경로로 대출을 받고 다닌 건 어떻게 알게 됐나.
“우연한 기회로 등기부등본을 떼어보게 됐다. 회장님이 9월 8일에 입원했는데 9월 26일 한국투자저축은행에서 65억이 대출됐더라. 인감은 내게 있을 때였는데. 우리 집 남자애(박 대표)하고 그래도 그 때는 말을 할 때였다. 65억 대출한 것 중 50억 원을 어디에 썼는지 내역서를 달라고 했다. 자꾸 다그치니 ‘정 그러면 소송하든지’라고 나오더라. 은행 쪽에서는 인감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대출을 해줬으니 근저당말소소송을 낸 거고. 그렇게 시작된 거다.”
이에 대해 박원석 대표 측은 “아버지가 쓰러진 후 ‘소송을 해볼 테면 해봐라’는 식의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대출 부분도 아버지 박만송 회장의 허락을 받고 시행된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딸들이 둘씩 나뉘어 한 쪽은 어머니 편, 한 쪽은 동생 편을 들고 있는데.
“지금 큰애와 셋째만 나를 돕고 있다. 둘째는 내가 예뻐하던 딸이었다. 미국에 살다가 잠시 들어와서 원석이와 얘기하더니 마음을 바꿨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른다. 둘째, 막내와는 왕래가 없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재판이 길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언제쯤 사람이 돼서 ‘엄마 죽을죄를 졌으니까 용서를 해줘 엄마’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은 ‘얼마나 자식을 잘못 키웠기에’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이 보는 것 같아 어딜 가도 부끄럽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진실을 밝히고 제발 좀 올바르게, 바른 생활을 하고 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며 살면 자기 자신이 불쌍하지 않나. 아버지가 저렇게 누워 계시다가 언제 어느 때 돌아가실지 모르지 않나(울먹).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뭔가 묻고 싶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