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함 행방 아리송 재산 상속도 불씨로…
지난 10월 30일 서울 시립미술관 천경자상설전시실에서 시민들이 작품을 둘러보며 추모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8월 19일 오후 네다섯 시쯤 전화가 와서 천 화백님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서울특별시 문화관리팀 박인숙 팀장은 이같이 말했다. 박 팀장은 “혜선 씨가 대리인을 통해 ‘그림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그분이 유골함을 들고 오셨을 때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실과 수장고 앞까지 안내해드렸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20일 천 화백의 큰딸인 이혜선 씨는 자신의 국내 대리인과 함께 고인의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를 다녀갔다. 박 팀장은 “서울 시민을 위해 작품을 기증하신 분이었고 큰따님이 원했기 때문에 사망 소식을 외부에 알릴 수 없었다”고 보탰다. 그렇게 천 화백의 사망 소식은 고인이 세상을 떠나고 두 달여가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천 화백의 사망경위에 대한 첫 번째 의혹은 여기서 출발한다. 천 화백의 다른 자녀들이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인은 슬하에 네 자녀를 뒀다. 천 화백은 지난 1944년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이철식 씨와 결혼해 장녀 이혜선 씨와 장남 이남훈 씨(67)를 낳았다. 이철식 씨와 이혼한 뒤 천 화백은 두 번째 남편 김남중 씨를 만나 딸 김정희 씨와 아들 고 김종우 씨를 낳았다. 그렇지만 김 씨와의 결혼생활도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못하며 네 자녀는 천 화백이 홀로 키웠다.
이혜선 씨를 제외한 장남 이남훈 씨와 차녀 김정희 씨, 정희 씨의 남편 문범강 씨, 차남인 고 김종우 씨의 부인 서재란 씨 등 네 명은 지난 10월 2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10월 18일 한국의 은행으로부터 어머니 통장 계좌 해지에 동의를 요구하는 전화를 받고서야 어머니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며 “수장고 방문소식도 장례절차나 추모행사에 대한 소식조차 알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고 밝혔다.
이 씨가 천 화백의 사망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 씨는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은 엄마의 유해와 작품을 지키는 것이다”며 “동생에게 ‘내가 집을 비워야 하니 하루만 엄마를 봐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가족 사이의 갈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 씨도 기자회견 당시 “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수년째 지속해 유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며 “이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의 명예에 누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를 포함한 다른 자녀들은 “유골함의 위치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는 입장이지만 이 씨는 유골함의 위치에 대해서도 함구 중이다. 현재 유골함은 미국 뉴욕의 작은 성당에 봉안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김 씨는 기자회견 당시 “98년경 어머니 집을 방문했다가 경찰로부터 제지당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며 “그 땐 경찰에 체포당할 뻔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생들이 엄마를 모시기 힘들다고 해서 뉴욕에서 머물렀다”며 “12년 동안 병간호를 했는데 힘들 때는 동생들이 모른 체 했는데 이제 와서…”고 밝혔다. 실제로 이 씨는 천 화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주사 놓는 방법까지 배울 정도로 정성껏 어머니를 보살폈다고 한다.
가족들 사이에 천 화백의 유산, 특히 작품(그림)을 두고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는 걸까.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천 화백의 작품은 올해 7~9월까지 미술 경매시장에서 15억 9075만 원 어치가 판매됐다. 7월엔 K옥션 경매에서 천 화백의 1989년 작 ‘막은 내리고’는 8억 6000만 원에 낙찰됐다. 올해 K옥션은 온라인-오프라인 경매에 천 화백의 작품 26점을 출품했고, 서울옥션은 5점을 경매했다.
한국미술품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천 화백의 작품은 총 43점 중 35점이 낙찰돼 약 9억 9215만 원어치가 팔려 낙찰총액 10위권에 차지했다. 평균 호당가격은 8250만 원이었다. K옥션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천경자 선생님이 별세하셨기 때문에 시세가 그 이전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며 “박수근 화백님과 김환기 화백님과 천 화백님 작품의 경매가가 톱3 안에 든다”고 밝혔다.
현재 장녀 이 씨가 관리하고 있는 고인의 작품이 몇 점이나 되며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차녀 김 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1998년 어머니가 미국 언니 집으로 가시면서 작품 등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가져간 뒤 나머지 유가족은 작품 한 점 소장해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어머니 작품은 우리 것이 아니라 어머니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며 “작품을 우리 재산으로 만들기 위해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밝혔다. 고인의 작품을 둘러싼 자녀들의 갈등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그렇지만 고인의 작품에서 고인의 재산으로 시선을 넓히면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둘째 딸 김정희 씨와 둘째 아들 고 김종우 씨의 부친인 두 번째 남편 고 김남중 씨는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번째 남편의 유산 상당 부분이 천 화백에게 상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천 화백이 남긴 재산 가운데에는 두 번째 남편에게 상속받은 유산도 포함돼 있다. 기자회견에서 차녀 김 씨는 “언니가 재산권부터 시작해 어머니를 돌보는 문제까지 전권을 다 가졌다”고 밝혔다. 결국 고인의 작품을 제외한 재산, 특히 두 번째 남편 김 씨가 유산으로 남긴 재산은 향후 상속 다툼의 불씨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고인의 네 자녀는 법정 상속분을 받을 수 있으며 고인이 유언을 남겼을지라도 자녀들은 법정 상속분의 2분의 1 수준인 유류분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천 화백 자녀들의 갈등이 향후 상속 다툼의 이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