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에서 ‘근육’ 키워 폭력·소송의 터널로…
전설적인 힙합 뮤지션 투팍 샤커. 배에 새긴 ‘THUG LIFE’ 문신에서 그의 거친 삶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예술에 사로잡혔다. 12세 때부터 시를 썼고, 볼티모어 예술학교에 다닐 땐 연기, 재즈, 춤 그리고 문학에 심취했다. 연극과 발레 공연 무대에 꾸준히 섰고, 한편으론 비트박스에 능한 래퍼로 각종 힙합 경연 대회를 휩쓸었다. 하지만 1988년, 캘리포니아로 이사 가면서 그의 인생은 급속히 바뀐다. 뉴욕의 할렘 출신인 그는 캘리포니아의 마린시티에 살면서, 동부와 서부의 슬럼 지역을 모두 경험하게 되었고, 폭력으로 얼룩진 그의 ‘스트리트 라이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90년 투팍은 힙합그룹 디지털언더그라운드의 투어 매니저 겸 백업 댄서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사고는 시작되는데, 어느 파티에서 한 여자를 놓고 시비가 붙어 상대방이 투팍에게 샷건(산탄총)을 겨누기도 했다. 1991년엔 소송이 있었다. 투팍은 무단횡단을 했다는 이유로 오클랜드의 백인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맞았는데, 그는 경찰 당국에 1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법원은 투팍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판결로 받은 돈은 4만 3000달러. 이마저도 대부분 변호사 비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잡다한 마찰에 지나지 않았다. 1992년에 있었던 총기 사고는 심각했다. 당시 마린시티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투팍은 야외 공연을 했는데, 행사가 끝나자 그곳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아수라장이 된 것. 당시 투팍은 갱스터 출신 수행원들과 함께 있었는데, 반대파 갱스터들이 혼란을 틈 타 공격했다. 투팍은 38구경 피스톨을 꺼내 들었는데 인파에 휩쓸리면서 땅에 떨어트렸고, 일행 중 한 명이 그 총을 주웠다. 잠시 후 총성이 들렸고, 희생자는 갱스터가 아니라 약 90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타던 카이드 워커-테알이라는 6살짜리 소년이었다. 이마에 총을 맞은 카이드는 즉사했고, 경찰은 투팍의 의붓형제인 모리스 하딩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하지만 검찰은, 누가 총을 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에 아이의 어머니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투팍은 합의금으로 30만~50만 달러의 돈을 지불했다.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1993년은 정점이었다. 투팍은 자신의 운전기사가 차 안에서 마약을 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했다. 미시간에서 콘서트를 할 땐 이 지역 힙합그룹 M.A.D의 멤버 천시 윈을 야구 배트로 때리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무대에서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었고, 천시 윈의 마이크를 집어 던졌던 것. 윈이 항의하자 폭력을 휘둘렀다. 콘서트는 결국 폭동 수준으로 번지고 말았고, 투팍은 30일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애틀란타 지역에선 경찰과 충돌했다. 이 지역의 형제 경찰이던 마크와 스콧 휘트웰은 부부 동반으로 밤새 파티를 즐긴 후 술에 취해 길을 건넜는데, 이때 투팍과 그 일행이 탄 두 대의 자동차가 질주하면서 그들을 칠 뻔했던 것. 이에 시비가 붙었고, 투팍은 총을 꺼내 들어 마크의 엉덩이와, 스콧의 다리와 복부에 총을 쏘았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마크가 먼저 투팍의 차에 총을 쐈다는 것이 밝혀졌고 검사는 기소하지 않았지만, 민사 소송을 통해 투팍은 21만 달러의 합의금을 줘야 했다.
한편 투팍은 1993년엔 영화감독 앨런 휴즈를 폭행하기도 했다. 투팍이 출연 예정이었던 <사회에의 위협>(1993)은 LA 지역 흑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하는 마약과 범죄 이야기로,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 앨런과 앨버트, 쌍둥이 형제 감독이 21세에 연출한 데뷔작이었다. 여기서 투팍은 좀 더 큰 비중을 지닌 역할을 원했지만 감독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리허설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해고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투팍은 일행과 함께 앨런 휴즈에게 폭력을 가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투팍의 ‘범죄 스토리’는 숨찰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1996년 25세에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삶은 압도적인 음악적 성취와 함께 폭력·소송·보복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