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피폭’은 각인, ‘한국인 참상’은 외면
원폭중심지 옆에 조성된 평화공원에는 우리나라 독립열사들이 모진 고문을 받으며 숨져간 형무소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빛바랜 철제 안내판에는 당시 형무소의 크기와 시설에 대한 설명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가을은 한국의 그것만큼 청명했다. <일요신문>은 10월 29일, 강제징용 역사 탐방의 첫 번째 도시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세 시간여를 차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어디를 가든 제법 큰 규모의 성당이 보였고, 색색의 노면전차가 자동차와 함께 달리며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이곳은 일본의 거대기업이자 강제징용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미쓰비시 그룹의 본산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항구도시로,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가톨릭 문화가 발달돼 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곳이다.
나가사키에서 취재진을 맞은 이는 기무라 히데토 씨(71)다. 기무라 씨는 나가사키 출신으로 15년 넘게 한일 역사문제와 강제징용 역사에 대해 공부해 온 아시아 역사 ‘통’이다. 한국 방송을 보며 한국어를 독학하고,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아리랑>, 박경리 작가의 <토지> 등 우리나라 사람도 완독이 힘든 대하소설을 탐독했을 정도로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다. 기무라 씨는 3박 4일 일정 동안 취재진과 동행하며 해설을 맡았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비석에는 ‘추도’라는 두 글자만 눈에 띄었고, ‘강제 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 중 피폭사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라는 추도문은 뒤편에 새겨져 있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취재진의 눈을 끈 건 멈춘 괘종시계였다. 반쯤 부서진 시계는 11시 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될 당시 멈춰버린 것이다. 당시 나가사키는 약 24만 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였다. 원폭 투하로 인구의 절반인 14만 7000여 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이후 후유증을 앓은 사람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 중에는 생활고를 이겨보려 일본으로 이주하거나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도 많았다. 나가사키 시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1만 2000~1만 3000명이며,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피해자가 2만 2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인 피해자가 650여 명, 그 외 다른 국적의 외국인 피해자가 200여 명이다. 기무라 씨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중 10%는 조선인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강제징용에서 원폭피해까지 이르는 비극의 연쇄 고리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스란히 겪었던 셈이다.
원폭 자료관에 뿌리 깊게 깔린 의식은 일본인이 ‘피해자’라는 점이었다. 어디에도 일본의 미국, 중국, 한국에 대한 침략 만행이 원폭 투하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명기되지 않았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되지 못할 ‘절대악’이지만, 역사적 균형감각은 원폭 자료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료관을 빠져나와 원폭낙하 중심지로 가는 길, 한 구석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현장이 또 있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다. 자칫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비석은 조용하게, 원폭자료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석에는 ‘추도’라는 두 글자만 눈에 띄게 선명했다. 그나마도 강제징용이라는 글자는 비석 뒤편에 새겨져 있었다. 강제징용 역사를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기록해온 이재갑 작가는 “‘강제징용’이라는 단어는 일본 정부에 예민한 문제라 앞에 새겨 넣지 않았다. 추도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모금해 만든 것이다”고 설명했다.
추도비는 일본 지식인들의 양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로 평화운동에 헌신한 일본인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주도로 시민 모금을 통해 추도비는 세워졌다.
추도비 앞에는 초등학생 20여 명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지만 추도비에 주목하는 건 한 무리뿐이었다. 기무라 씨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균형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일본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운에 달렸다”고 말했다. 비석 위에는 한국 돈이 놓여 있고, 밑에는 시민들이 두고 간 생수, 소주 등이 있었다. 원폭을 당하면 너무 뜨거워서 목마르다고 호소하며 죽어간다. 이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물을 둔 것이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은 원혼들이 물과 술이나마 조국의 것을 마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한국에서 가져온 음료를 놔두고 간다고 한다.
원폭자료관 바로 인근에는 원폭 중심지가 넓게 꾸며져 있었다. 중심지에 세운 조형물 앞에서 많은 일본 학생들이 열을 맞춰 서 묵념을 하거나,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무라 씨는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다. 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아이들이 저 노래를 배운다”고 설명했다.
원폭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조형물 앞에서 일본 학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원폭중심지 옆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언덕에 위치해, 공원 위에서는 나가사키 주요 피폭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화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샘’이 분수를 뿜고 있었다. 기무라 씨는 “지금은 큰 규모의 분수가 많지만 평화의 샘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엄청 큰 크기였다. 원폭 피폭자들의 목마름을 달랜다는 의미로 조성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나가사키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다. 영국에서 온 한 무리의 관광객이 일본인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지나갔다.
평화공원에서는 피폭을 당했던 지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우라카미 성당은 피폭 직후 한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은 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지어져 당시의 모습을 회복했다. 기무라 씨는 피폭 직후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취재진에게 설명했다. 기무라 씨가 가져온 사진에는 건물 일부가 무너진 우라카미 성당을 중심으로 폐허가 돼버린 모습이 담겨 있다. 성당이 아니었다면 같은 장소라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일본의 모순은 평화공원에서도 드러났다. 평화공원 중심에는 형무소 터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 독립열사들이 모진 고문을 받으며 숨져간 현장이다. 특히 주중 일본공사 암살 작전을 시행하다 발각된 백정기는 이곳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유해는 광복 1년 만에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에 안치됐다. 형무소 터를 주목하는 이는 기자 일행뿐이었다. 형무소 터임을 알리는 빛바랜 철제 안내판에는 당시 형무소의 크기와 시설에 대한 설명과 함께 “1945년 8월 9일 11시 2분에 형무소 직원, 수감자 등 134명이 사망했다”는 문장만 적혀있다. 일본의 피해의식을 강조하는 곳 한복판에서 죽어간 열사들은 이곳을 보며 무슨 얘기를 할까.
취재진은 발걸음을 옮겨 원폭자료관에 비해서는 너무도 초라하지만, 더 원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이다. 니시자카마치에 위치한 자료관은 가톨릭 순교자들의 처형지가 있던 언덕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료관에서는 다카자네 야스노리 이사장(76)이 취재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고 까만 얼굴을 흰 수염이 덮고 있어 영락없는 노인으로 보였지만,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에 대해 설명할 때만큼은 열정이 뿜어졌다.
오카마사하루 평화자료관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한 오카마사하루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연 곳이다. 오카 목사는 자국민 피폭자 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피폭자 민족주의’라며 반대운동을 펼쳤다. 2층으로 이뤄진 자료관의 벽면은 빼곡하게 강제징용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로 뒤덮여 있었다. 한쪽에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했던 갱도를 재현한 조형물이 있었다. 또 당시 사람들이 먹던 깻묵 등의 열악한 식사를 보여주는 모형물도 있다. 일본이 감추고 싶어 하는 당시 강제징용당한 인부들의 앙상한 사진,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 등이 걸려 있다. 2층까지 들어찬 자료를 설명하는 다카자네 이사장의 목소리에 결연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일요신문>은 나가사키 원폭과 당시 조선인의 삶을 확인한 뒤 다음날 일제 만행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군함도, 다카시마를 둘러봤다. 그곳에서도 일본의 가식과 모순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누구? 조선인 인권모임 결성 일본의 가해책임 추궁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1918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당하던 시기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신학교를 나와 40세까지 목사의 길을 걷던, 나가사키에 와 원폭 피해 현장을 보며 그 참상에 놀라 평화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1965년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대표로 일하며 일본의 가해책임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까진 일본은 피해의식으로 ‘가해자’라는 단어는 금기시되던 때였다. 강제징용 조선인이 사용했던 물품들이 오카 마사하루 평화자료관 안에 전시돼 있다. 적극적 평화운동을 위해 1971년 나가사키 시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건립,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 등에 힘썼다. 그의 지속된 요구로 나가사키시 차원에서 조선인 피폭자 조사가 1979년 이뤄졌지만, 조선인 원폭 희생자가 1400명 정도라는 결과를 받게 됐다. 이에 인권모임을 통해 원폭 피해자, 강제동원 인력 등의 실태를 조사해 <원폭과 조선인>을 발간했다. 진보적인 일련의 활동으로 우익단체의 끝없는 공격을 받고, 18살의 청년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94년 7월 오카 목사를 사망했고, 그의 유지를 받아 1995년 ‘오카 마사하루 평화자료관’이 건립됐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