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공세 식힐 ‘물벼락 작전’ 구상중
이들 시나리오들은 여당뿐 아니라 정부와 청와대를 아우르는 국정운영의 ‘새 판 짜기’ 구상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등장하는 각종 시나리오는 여권이 가진 자산과 에너지의 총화라고 할 만하다. 시나리오들이 정국 반전의 계기가 되고 종국에는 차기정권 재창출의 모멘텀(동력)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주목되는 이유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같은 시나리오들이 정교한 퍼즐게임처럼 단계별 로드맵의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현재 제시되고 있는 시나리오들은 각각 그 자체로도 완결성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여권의 정국 주도권 회수를 위한 ‘4단계 시나리오’의 단계별 구성인자로도 볼 수 있다.
#1 당 구심점 필요하다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올 연말 또는 내년 초에 당에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권의 상당수 소식통들은 두 장관의 복귀 필요성과 시급성을 적극 강조한다. 당의 구심이 없는 한 여당을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고 따라서 당내 지분을 양분하는 두 장관이 인기 관리나 이미지 관리만 할 게 아니라 최선두에서 당을 진두지휘해 정국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 체제 정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데 여권 핵심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연말 늦어도 연초 복귀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 현 지도부 물러나라
대선주자 복귀론과 지도체제 개편론, 조기 전대론 등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정동영·김근태 장관 두 사람이 복귀하게 될 경우, 우선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조기 전당대회 개최다. 당의 지지율을 10%대로 떨어트리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한 데 일정한 책임이 있는 현 지도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현재의 문희상 의장 체제를 유지하면서 정·김 두 장관이 내년 지방 선거에서 선대위원장을 맡게 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어떻게 정리될지는 아직 확언키 어렵다.
#3 연말 대대적 물갈이
노무현 대통령은 두 사람이 당에 복귀하면 그 시기에 맞춰 개각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연말 연초에 청와대 및 내각, 당을 아우르는 여권의 면모가 완전 재편되면서 정치권 전체가 선거 체제로 급속히 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내년 초쯤 중폭 개각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또 노 대통령이 청와대의 일부 수석비서관급도 교체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와 관련해 여야의 협력을 받아 노 대통령이 거국내각 구성을 결심할지도 관심사다. 또 총리에게 내각 구성의 전권을 넘겨주고 대통령은 외교·안보 분야에 전념하는 사실상의 이원집정제 실시 여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4 민주·민노당과 연합
거국내각 구성과 민주대연정 역시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노 대통령이 연말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특단의 제안을 정치권에 한 뒤 내년 초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정치권 외곽의 민주세력까지 포괄하는 민주대연정 차원의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라는 일부 보도도 나와 있다. 또 청와대측은 보도 내용 자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상이 ‘한나라당 대 청와대’의 대결국면과 맞물리면서 ‘한나라당을 포위하기 위한 연정’이라는 해석까지 낳고 있다.
여권이 이 같은 다단계 시나리오를 내놓는 이유는 최근 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와 여당지지도의 동반추락 현상이 장기화하고 이것이 대규모 민심이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또 이번 재·보선은 물론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재 범여권의 변혁과 체질강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면서 이 같은 시나리오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엿보인다.
당초 당 지도체제 개편론이나 기껏해야 정동영·김근태 장관의 당 복귀론 등의 차원에서 맴돌던 시나리오가 점차 연말 연초 개각과 민주대연정차원의 거국내각론 등으로 반경을 넓히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지점이다. 여권이 가진 자산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총력전을 펴 정국반전의 계기를 잡고, 이를 차기정권 재창출의 모멘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여권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복수의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에 대해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마음을 접었지만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추호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시나리오들이 과연 여권 내부의 현실적 역학구도 속에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당장 정동영 김근태 장관의 연말 연초 당 복귀론을 놓고 당 내부 심지어는 두 사람의 캠프 내에서조차 이견이 분분하다. 여기에 문희상 의장을 중심으로 한 현 지도부가 임기를 모두 채우겠다는 완주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점도 변수다.
민주대연정과 이를 통한 거국내각 구성 시나리오도 결국은 이런 흐름과 맞물려 있다. 물론 노 대통령의 개혁연정 또는 민주대연정 구상은 내각 구성의 전권을 당에 맡김으로써 개혁연정의 주도자로 열린우리당을 부상시키고, 그후 여당이 나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내각 참여를 추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대연정의 완전한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권 내부에서 전망이 엇갈린다.
당장 연정 대상인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행보가 정부 여당과 맞지 않는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물 건너가면서 민주 제 세력 및 군소정당들과 거국내각을 구성해 정국 운영의 면모를 일신하자는 구상은 거꾸로 소(小)연정의 변형 또는 외연 확대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3당으로 올라선 민주당이 이미 중부권신당과의 협력 및 고건 전 국무총리 세력 등과의 3자연대를 추진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은 여러 현안에서 정부 여당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구국운동’과 보수세력의 반격에서 비롯된 ‘빅뱅 정국’을 여권이 구세력 대 민주세력의 구도로 몰아갈 경우 이 같은 시나리오가 실제로 살아 꿈틀댈 가능성도 있다. 어차피 정치는 생물이므로.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