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 | ||
3월 말 스프링캠프의 마지막 시범 경기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1루를 커버하다가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을 다치면서 쉽지 않은 시즌의 전조가 나타났던 것. 햄스트링 부상의 전력이 없었던 박찬호는 지난 겨울 ‘5년간 최소 6천5백만달러’에 계약한 부담감과 생전 처음 주어진 에이스의 책임감 등으로 무리한 개막전 등판을 강행했고, 오클랜드의 4월초 쌀쌀한 날씨 속에서 부상은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MLB 데뷔 후 처음으로 부상자 명단(DL)에 오르며 무려 40일 동안 개점 휴업하는 사태를 맞았다.
DL에 오른 지 41일 만인 5월13일 현역에 복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5이닝 1실점으로 막으며 레인저스에서 첫 승리를 거뒀지만 박찬호는 과거의 폭발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했다. 8월초까지도 계속된 부진과 슬럼프에 시달리는 바람에 ‘먹튀’라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박찬호의 부진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다. 2001 시즌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가 된 박찬호는 지난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15승을 이끌어냈다. 5월초 시카고 컵스전에서 시작된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 꾹 참고 견뎌내며 공을 던졌다. 결과적으로 레인저스와 5년 장기계약을 체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부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장거리 러닝을 할 수 없었다는 점. 박찬호가 하체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몸으로 던지는 투구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체구가 큰 외국 선수들 중에는 상체와 팔의 힘만으로도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있지만, 박찬호는 트레이드마크인 강인한 하체를 이용한 정통파 투구폼으로 1백55km가 넘는 강속구를 뿌려댔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진출 이래 단 한번도 거른 적이 없던 장거리 달리기를 허리 통증으로 인해 포기하면서, 그의 투구 동작과 힘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팀을 옮기면서 오스카 아코스타라는 투수 코치를 만난 것도 박찬호에게는 악연이었다. 겨울의 휴식으로 허리 통증에서 벗어난 박찬호는 러닝 재개를 희망했으나, 원래부터 하체를 이용한 투구법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코스타는 허리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장거리 러닝 대신 대체 운동을 권했다. 스프링캠프 기간에라도 열심히 달렸더라면 햄스트링 부상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지난 6월 부진의 늪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던 박찬호는 삭발이라는 강수를 두며 재기의 투혼 을 불사르기도 했다. | ||
7월부터 이닝수도 늘어나고, 강속구도 점차 위력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강호 레드삭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5와1/3이닝 동안 무려 9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위력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록 물집 때문에 막판 실점이 많았지만, 톰 힉스 레인저스 구단주와 코칭 스태프가 박찬호의 부활을 예감한 경기였다.
그러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물집으로 다시 DL에 오르는 또 한번의 뒷걸음질 끝에 박찬호는 8월24일 명문 뉴욕 양키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6이닝 2실점의 역투로 시즌 5승째를 거머쥐었다. 최강팀 양키스를 상대로 적지에서 따낸 이 승리는, 자신의 구위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은 소중한 1승이었다. 이 경기부터 박찬호는 5연승 가도를 달리며 비난 일색이던 댈라스 언론으로부터 ‘드디어 에이스가 돌아왔다’는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다.
박찬호 부활의 가장 큰 힘은 역시 부상 완치와 계속된 러닝으로 하체가 힘을 받쳐주기 시작한 점이다. 6월에 다시 장거리 러닝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시일이 걸렸다. 그러나 시즌 중반까지도 1백50km를 밑도는 포심 패스트볼이 최근 최고 1백54km까지 나오는 등 구속의 회복 기미가 확연히 보이고, 1백20km 이하의 슬로우 커브를 레퍼토리에 가미하면서 박찬호는 5연승 가도를 달렸다. 구위의 회복은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되찾는 데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다저스 시절부터 선배이자 스승처럼 따르던 오렐 허샤이저가 투수 코치로 부임한 것도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허샤이저는 언론과 코칭 스태프, 심지어는 선수들과도 불화를 일으키던 아코스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박찬호에게는 훨씬 편안한 존재다. 투수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평범하지만 초구 스트라이크와 강속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스타일이 박찬호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23일 오클랜드전에서 난조를 보이며 10승 달성에 실패한 박찬호는 “문제점을 찾았기 때문에 다음 경기에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레인저스로서는 이미 올시즌이 실패로 끝났지만, 박찬호의 부활은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다.
물론 내년 시즌에도 아메리칸리그 서부조의 오클랜드, 애너하임, 시애틀 등 강팀들 사이에서 레인저스는 힘든 시즌을 보낼 것이 뻔하다. 그러나 박찬호는 적어도 올시즌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은 분명하다. 오프 시즌 동안 충분한 휴식에 이은 개인 훈련을 충실히 한다면, 다시 15승, 20승에 도전하는 박찬호의 모습을 기대할만하다.
민훈기 스포츠조선 미주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