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말 한마디 붙이지 않던 콧대 높은 동료들이 먼저 말을 걸고 아는 체 하는가 하면 구단측에선 큰 평수의 빌라를 제공해주는 등 달라져도 보통 달라진 게 아니다.
진실은 하나. 실력이 좋으면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럽 선수, 그것도 벨기에 선수들을 한수 아래로 보고 자신감 있게 밀어 붙였던 것이 부진 탈출, 골 득점의 기폭제가 되었다. 전엔 아무리 결정적인 골 찬스를 갖고 있어도 저한테 볼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선수들이 저부터 찾아요. 어떻게 해서든 볼을 넘겨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정말 좋아져요. 저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거죠.” 평소 말수 적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설기현의 목소리는 붕 떠 있었다.
생후 50일된 아들 인웅이와 놀아준 이력 때문인지 아니면 축구가 잘돼서인지 설기현답지 않은 흥분이 전화선을 타고 흘러 왔다. 올시즌 새로 부임한 후고 브로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해 무크롱 감독 시절 때만 해도 브로스 감독 눈에는 설기현이 별 볼 일 없는 동양 선수에 불과했다.
안더레흐트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시즌 초반에도 설기현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다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며 브로스 감독은 무릎을 쳤다고 한다. 자신이 저평가했던 동양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맹활약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넘어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것.
“팀에 복귀하자 절 보는 눈이 달라지셨더라구요. 그동안 제가 부진했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신 후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정말 축구를 잘하고 볼 일이에요.” 그동안 브로스 감독을 비롯한 팀 동료들의 눈에 설기현은 이방인과 다름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없는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고 의사소통의 한계로 인해 운동장이나 라커룸 한쪽에서 한국 책을 읽으며 담을 쌓는 듯한 모습이 곱게 비쳐졌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월드컵을 통해 그 벽은 쉽게 무너졌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먼저 아는 체하며 설기현과 한팀에서 뛰게 된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상황으로 반전되다보니 처음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고.
▲ 설기현 [스포츠서울] 제공 | ||
처음엔 그분들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 응했지만 반복되다보니 배가 고파도 부담스러워 밥을 먹으러 갈 수 없더라구요. 그땐 하루 빨리 벨기에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정신 없는 스케줄을 소화한 뒤 만삭의 아내와 벨기에로 향했을 때 설기현은 덜컥 겁부터 났다고 한다.
한동안 월드컵에 파묻혀 신나게 즐기다가 막상 벨기에행 비행기에 오르고보니 다시 소속팀에 적응할 일이 까마득했던 것.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다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도전 정신으로 노크한 안더레흐트는 이전의 ‘요새’가 아닌 친근한 ‘이웃’처럼 다가왔다.
한 골씩 득점을 올릴 때마다 경기장에 태극기 물결이 증가하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벨기에 사람들도 ‘세올’을 외치며 설기현을 열심히 응원했고 설기현도 기대에 부응하며 인기를 더해갔다.
하루에 한두 건 이상의 인터뷰가 매일 계속 되고 리그 시작부터 연속 4경기에서 6골을 터뜨리며 언론에서 선정하는 게임 MVP에도 뽑혔다. 말 그대로 설기현의 전성시대가 벨기에 리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만해도 용병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무척 심했어요. 경기를 잘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성적이 나쁘다보니 더 힘들더라구요. 한때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여긴 조금만 성적이 안좋아도 관중들의 야유가 대단히 심하거든요. 경기도 못하지, 무명이나 다름 없는 동양 선수지, 팬들 입장에선 이쁘게 봐줄 만한 구석이 없는 거예요. 와이프 아니었으면 벌써 보따리 쌌을 겁니다.”
설기현은 벨기에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다니며 ‘세올’을 외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고 한다. 벨기에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조금씩 벨기에 사람들이 좋아진다. 그래도 올시즌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벨기에를 떠나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고 한다.
바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행이다. 벌써부터 유명 팀에서 영입 제의를 해오기도 했지만 더 실력을 쌓아 비싼 몸값을 받고 제대로 이적하고 싶은 생각이다. 만약 대학 졸업 후 벨기에가 아닌 프로팀을 선택했다면 설기현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빅리그 입성을 코앞에 둔 지금 다소 힘들게 길을 돌아왔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게 됐다며 ‘수다를 떠는’ 설기현한테 행복의 무지개가 진하게 걸려 있는 듯하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