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70년 역사 중에 북한을 방문한 사무총장은 1979년의 쿠르트 발트하임과 1993년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두 사람뿐이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을 때였다. 발트하임은 남북대화의 중재자 역할을 할 뻔했으나 그해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무산됐다. 갈리는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이라 역할을 못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17년 집권 기간 중에도,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현 체제 출범 뒤에도 북한을 방문한 사무총장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이 ‘금주 중’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지난 16일자 <연합뉴스> 보도는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금주라는 시점이 오보로 밝혀졌음에도 속보는 계속되고 있다. 반 총장의 방북 문제가 북한과 유엔 양 쪽에서 긴밀하게 논의된 정황도 확인됐다. 프랑스 파리의 IS 테러라는 돌발변수로 인해 이 뉴스가 묻힌 분위기지만 조만간 방북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유엔 사무총장이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지난 22년 동안 북한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금단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비정상이다. 더욱이 반 총장은 분단의 당사국인 한국 출신 사무총장이다.
유엔에서 한국인 사무총장이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한다면 그의 방북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북한은 귀중한 시간을 허송한 것이다. 지난 5월엔 반 총장의 개성공단 방문계획을 승인했다가 아무런 설명 없이 취소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사무총장 이전에 동족인 그에게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와, 남북한 사이에 가교 설치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10년 임기 중 1년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이제라도 북한이 그런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남북관계에 분명 긍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5월 러시아에서 9월 중국에서 각각 열린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식 참석을 저울질하다가 불참했다. 그의 불참은 러시아로부터는 경멸을 샀고, 중국에서는 1954년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섰던 자리에 박근혜 대통령이 서는 모습을 봤다.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집권 3년차에 불과한 김정은이지만 이제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라는 각성을 했을 법도 하다. 유엔은 김정은의 탈각(脫殼)을 위해선 가장 유효적절한 무대다. 한국인 사무총장은 그의 국제무대 등장을 후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이다.
북한과 유엔의 궁극적인 화해는 북핵문제 해결에 달렸다. 이 문제가 반 총장 방북으로 일거에 해결될 사안은 아니나, 해결의 단초는 열 수 있다.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정은이 유엔 총회에 참석해서 핵 폐기에 대해 연설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 사장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