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DJP 연합’ 카드로 러브콜
비노계에서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펴 그 배경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2009년 8월 1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인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찾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박지원 의원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로 향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다. 꺼낼 카드는 거의 다 나왔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다. 반기문 카드의 핵심인 ‘호남과 DJ, 햇볕정책’의 상관관계는 중도개혁, DJ 노선의 계승이다. DJ의 정권 탈환 방정식인 DJP(김대중·김종필) 연합론이다. 호남과 DJ, 햇볕정책이 공천 대학살 위기에 처한 비주류의 생존 코드라는 얘기다. 야권 비주류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카드는 현실 가능한가.
그간 반기문 총장과 동교동계의 교감설은 정치권 안팎에서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반 총장과 야권은 운명공동체라는 논리다. 특히 동교동계 일부는 반 총장이 언급될 때마다 ‘햇볕정책 신봉자’라고 규정했다. 반 총장은 조만간 방북, ‘반기문 외교력’을 전 세계에 알릴 채비를 하고 있다. 전략적으로도 동교동계와 반기문의 연대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얘기다. 박 의원은 이와 관련해 “반 총장이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대북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진보적”이라며 “햇볕정책을 신봉하는 분”이라고 잘라 말했다.
구체적인 플랜도 작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의 우군인 △충청포럼(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등이 주도) △외교부 전·현직 외교관들 △기독교그룹 등 3∼4개 그룹이 동교동계 및 박 의원에게 직·간접적으로 반 총장의 대권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박 의원도 “반 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룹이 몇 개 있었다”고 귀띔했다. 다만 반 총장이 직접 오더를 내린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전략은 ‘뉴 DJP 연합’이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호남의 DJ와 충청의 JP가 연합전선을 펴면서 ‘이회창 대세론’을 침몰시켰다. 호남과 충청 바람을 수도권으로 확장해 중부권을 강타하며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영남권에 가뒀다. 이른바 ‘이회창 영남 고립 작전’이다. 결과는 대성공. 민주개혁세력이 연합정치로 정권을 탈환한 첫 번째 사례였다.
2002년 대선에선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인물연대 전선을 펴면서 또다시 이회창 대세론을 격침했다. 차기 대선의 캐스팅보트인 충청에 기반을 둔 반 총장과 ‘문재인 체제’에 대한 민심이반을 보이는 호남이 맞물릴 경우 ‘포스트 박근혜’가 없는 여권을 단숨에 꺾을 수 있다는 주장도 이 지점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박 의원을 비롯해 야권 내 복수 인사는 반 총장이 여권 내 주류 일각에서 제기된 ‘이원집정부제 개헌’ 구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친박(친박근혜)계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이 제기한 이원집정부제 개헌은 반 총장이 외치를, 친박 실세가 내치를 담당하는, 사실상 현재 여권 주류가 실권을 쥐는 형태다. 반 총장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박 의원은 “(반 총장 측이)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반 총장이 야권 후보로 나선다면, 실권을 쥘 수 있다며 강력한 러브콜을 보낸 셈이다. 2016년 총선은 물론, 2017년 대선 정국에서도 반기문 대망론이 야권 비주류의 승부수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친노(친노무현)계의 생각은 달랐다. “마땅한 대선주자가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 같다”는 게 야권 범주류 관계자는 단호한 평이다. 현재 비주류는 문재인 대표의 대항마가 없다. 한때 중도 무당파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안철수 의원이 있지만, 예전만큼의 파괴력은 아니다.
박 의원도, 비주류의 좌장격인 김한길 의원도 대중성이 약하다. 천정배 무소속 의원도 마찬가지다. 천정배 신당은 창당 명분도 약하다. 강력한 대권주자도, 창당 명분도 없는 제1야당 비주류와 천정배 신당. 이것이 반문(반문재인)그룹의 현실이다. 대권 탈환 및 신당 창당의 성공 조건이 결여돼 있다.
지난 2000년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급조된 민주국민당(민국당)도 그랬다. 한나라당 공천 대학살의 희생양인 허주 김윤환, 서석재 의원 등이 급조한 민국당은 16대 총선에서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4년 뒤 2004년 총선에선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박세일 전 한나라당 의원의 ‘국민생각’, 동교동계 한광옥 전 민주당 의원의 ‘정통민주당’ 등도 참패를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강력한 리더 없는 ‘도로 한나라당’, ‘도로 민주당’이란 공통점이 있다. 창당 명분도 뚜렷하지 않았다.
반면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 복귀를 선언한 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달랐다. 3년차를 맞은 YS 정권에 대한 실망감은 날로 커졌고, 야당은 리더십 부재에 시달렸다. 이기택을 시작으로 이부영, 노무현 의원 등이 건재했지만, DJ의 빈자리를 메우지는 못했다. 호남당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는 DJ라는 대중적 지도자와 창당 명분 등을 일거에 획득했다. 결국 동교동계 인사를 재규합해 만든 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으면서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현재 야권 내 비주류와 신당 창당 세력은 ‘분열의 잔혹사’를 쓴 민국당 등에 가깝다. 외부수혈 없이는 정면돌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주류 내 일각에서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실제 새정치연합 선출직 공직자 평가위원회(위원장 조은)는 이미 시행세칙을 의결, ‘현역 의원 하위 20%’를 배제하기 위한 물갈이 작업에 돌입한 상황이다. 호남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 대표는 이를 밀어붙였다.
새정치연합 전남·북 도당위원회는 중앙당의 당무 감사를 보이콧하기로 했다. 이번 감사 결과는 평가위원회의 지역 의정활동 평가(10% 비중)에 반영될 예정이었다. 호남 의원들의 조직적 반발에도 비주류가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셈이다.
친노계도 급박하게 움직였다. 조문 정국이 한창인 11월 23일 여의도 정가에선 문 대표가 ‘모종의 승부수’를 준비하려다가 이를 거뒀다는 말이 돌았다. 이미 ‘문·안·박(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공동 지도체제를 제안한 상황에서 또 다른 승부수가 ‘뉴 파티 비전’인지, 아니면 ‘친노 2선 후퇴’ 등의 초강수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주류의 공천 지분 요구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시그널만은 재차 확인한 게 아니냐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문 대표는 11월 23일과 24일 당 공식 회의 등에도 불참하면서 장고에 돌입한 뒤 25일 광주로 내려갔다. 그는 ‘호남의 심장’ 광주에서 “정권교체를 통해 호남의 꿈을 되살릴 자신이 있다”며 “호남과 새정치연합은 운명공동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여러분들에게 우리 당이 보여드릴 것은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에 대한 확신”이라고 호남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비노계는 격분했다. 주승용 최고위원은 “문 대표가 ‘(당을) 나가려면 나가고 해보려면 해봐라, 가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참패를 거듭하고도 이처럼 끈질긴 대표는 없었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비노계 한 관계자는 “빠르면 12월 초 새정치연합 내 두세 의원들이 천정배 신당에 합류할 것이란 말이 돌고 있는 상황이다. 조만간 뭔가 터지기는 할 것 같다”며 “천정배 신당에 동교동계 일부가 참여하고 여기서 반기문 대망론까지 가세한다면, 새정치연합에 진짜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새정치연합 비주류에게 반기문 카드는 꽃놀이패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