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 위해 … 정몽준 엿들었다”
▲ 지난 2002년 11월22일 후보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에 나선 노무현(왼쪽) 정몽준 후보. | ||
특히 국정원은 지난 2002년 3월 이후 불법도청을 중단했다고 발표했지만 정가에서는 그 이후 대선 과정에서도 불법도청이 계속돼 왔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은 과거 불법 도청의 최대 수혜자가 2002년 대통령 선거 때의 노무현 민주당 후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정치공작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불법 도청이 이루어졌다는 전직 정부관계자의 주장이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이 관계자는 “도청을 지시한 주체는 앞으로 규명이 필요하겠지만 당시 국정원이 정 후보측의 통화를 도청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 노 후보가 이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도청 자료가 직·간접적 루트를 통해 정치공작용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향후 검찰의 조사 여부가 주목된다. 과연 국정원의 ‘안테나’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과정에도 뻗어 있었는지 진상을 추적했다.
지난 8월8일 김승규 신임 국정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나갔다. 당시 김 원장은 “정직한 고백만이 국정원의 어두운 과거를 씻고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밝히면서 “불법 감청은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2년 3월 이후 완전히 근절됐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정치권에서는 ‘김 원장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적잖이 나오고 있다.
2002년 3월 이후에도 국정원의 불법 도청이 계속돼왔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먼저 지난 2002년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세 차례 도청 문건을 공개했는데 그 가운데 정형근 의원이 폭로한 1차 문건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2002년 11월 김영일 사무총장과 12월 이부영 선대위 부위원장이 각각 2차, 3차 불법 도청 문건을 공개했는데 그 문건의 내용은 모두 2002년 1월~3월 사이의 것이었다).
정형근 의원은 2002년 9월 국정감사에서 ▲2002년 8월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 사장의 대북 사업 관련 국제전화 ▲2002년 9월 대한생명 인수 문제에 대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김현섭 청와대비서관 간 국제전화 내용 등을 차례로 폭로한 바 있다.
국정원이 불법 도청을 근절했다고 발표한 2002년 3월 이후인 8월과 9월의 상황을 담고 있던 문건인 것이다. 이는 국정원이 ‘3월 도청 근절’ 이후에도 계속 불법 도청을 해왔을 개연성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 의원의 1차 문건이 ‘진본’인지의 여부를 명확하게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국정원 발표대로 3월 이후에는 도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정 의원의 폭로 자료는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 의원 문건의 진본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검찰의 국정원 불법 도청 수사 발표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검찰은 지난 2002년 한나라당이 폭로했던 문건은 대부분 국정원에서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구속된 신건 전 국정원장의 영장에는 박지원 전 청와대 수석의 취업 청탁 관련 통화 등 한나라당의 폭로 문건과 똑같은 내용을 담은 4건의 도청 사실이 적시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토대로 보면 지금까지 국정원의 당시 도청문건과 관련한 해명이 대부분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2002년 문건이 공개되자 “공작정치에 능한 사람들이 사설 공작대를 동원해 자체 도청을 실시했거나 사설 정보지에서 거론되는 유언비어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며 한나라당을 강도 높게 비난했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도 2002년 12월3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도청 문제를 질문 받고 “도청자료는 한나라당 내 많은 공작전문가들이 만든 자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과 민주당의 ‘문건 조작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이 2002년 3월 이후에도 계속 불법 도청을 해왔을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정황은 또 있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았던 김영일 전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미발표 도청 문건도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2002년 3월 이후 만들어진 문건도 분명히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문건 중에는 정국을 바꿀 만한 민감한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문건 신뢰도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제보자를 밝히라는 압력이 많아 더 이상 폭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 전 총장은 지난 2002년 11월29일 문건 폭로 기자회견에서도 “(자료가 2002년 3월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기의 자료도 많으며 추가 공개를 검토중이다. 최근 것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한 언론은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의 말을 인용해 “폭로된 자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자료가 미발표 상태였다. 책자로 7~8권 분량의 방대한 양이었다. 정몽준 대표를 포함한 현대 관련 기록이 책 한 권 분량이고 박근혜 한화갑 의원과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 권씩, 언론인 관련 사항이 3권 분량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도 2002년 3월 불법 도청 근절 주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그는 지난 8월 국정원의 발표에 대해 “신건 원장이 국내 도청을 전담하는 과학보안국(8국)을 해체한 건 2002년 3월이 아니라 대선 직전인 2002년 10월이다. 2002년 9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한화의 대생 인수와 관련한 국정원 도청 테이프를 폭로하니까 신건 원장이 선거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부담을 갖고 10월에 해체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 ‘불법도청 근절 진상조사단장’을 역임했던 권영세 의원은 더 나아가 노무현 정권 출범 직전까지 불법도청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2003년 봄까지 휴대폰 도청이 이뤄졌다는 류의 제보를 수없이 받았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놓고 보면 국정원의 불법 도청이 2002년 3월에 근절된 것이 아니라 최소한 12월 대선 과정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혹이 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의혹을 뒷받침하는 보다 구체적인 주장도 나왔다.
최근 한 전직 정부관계자는 “국정원이 지난 2002년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위해 정몽준 후보를 도청했었다”고 주장해 관심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도청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지난 2002년 10~11월은 ‘이회창 대세론’에 맞서기 위해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 단일화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당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김심’이 노 후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적극 도와주었다. 그런데 박 실장이 국정원장에게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 수뇌부가 스스로 판단한 것인지는 규명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정몽준 후보측에 대한 국정원측의 도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제의했던 11월1일부터 여론조사로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 나가기로 최종 확정됐던 25일까지 국정원의 정보 관계자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빨라졌다. 최근 검찰 조사에서 민주당 최고위원들도 도청 대상자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을 보면 유력 대권 후보였던 정몽준 후보에 대한 도청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정원의 대선 당시 불법 도청 의혹에 대해 정몽준 의원측은 대체로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공보특보를 맡았던 정광철 보좌관은 “당시 노무현-이회창 후보 양쪽 모두에게 견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도청에 대해 의식을 했다. 그런데 정 후보는 2개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안 때문이 아니라 받는 전화와 거는 전화를 구분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전화번호가 일단 공개만 되면 계속 추적이 되니까 여러 번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불법 도청에 대해 의식은 했지만 대책은 마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도청을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전화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정 후보측 도청’ 주장에 대해 격앙된 표정이다. 정보위 소속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불법도청의 최대 수혜자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정치공작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는 정치공작의 피해자다. 이번에 불법도청을 확실히 밝혀 앞으로 다시는 정치공작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여권의 한 관계자는 2002년 대선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의 도청 의혹에 대해 “결코 그럴 리가 없다”면서 “대선을 앞두고 도청문건이라며 폭로정치에 나섰던 한나라당이야말로 도청의 수혜자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한편 국정원 관계자는 정몽준 후보측 도청 의혹에 대해 “지난 2002년 3월 이후 불법 감청한 건은 없다. 그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한나라당 폭로 문건의 진위에 대한 검찰 조사와 관련해 “좀 더 기다려 보자. 그것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또한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한 DJ정부 인사는 “박 실장이 대선 때 도청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면서 “DJ의 복심인 박 실장이 도청행위에 대한 DJ의 혐오감을 몰랐을 리 없다”고 전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