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국의 대표적인 타격왕 이만수가 미국으로 건너가 코치가 된 지 벌써 5년. 자비로 미국으로 건너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야구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그러나 도미할 때의 초심과 지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때는 솔직히 은퇴할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김정훈 CSMG 스포츠 사장)가 주선해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싱글A에서 타격코치를 시작했다. 야구인생 30년이 새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가족이 같이 있어 도움이 됐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음식과 언어였다.
처음에는 피자 핫도그로 때웠는데 김치가 너무 그리웠다. 미국 사람들이 김치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고추 할리피노를 식사 때마다 뿌려먹으면서 적응이 됐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는데도 매운 것만은 잊을 수 없었다.” 그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처럼 인간 이만수는 변한 것이 없었다.
미국 야구를 처음 접했을 때 이만수는 문화적 차이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뭐랄까 정 같은 게 없다. 지킬 건 지키는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코치인데 선수가 내 뒤통수를 딱 치며 ‘헤이 만수’ 이러는 거야. 속으로 삭이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또 코치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심해 심적으로 부담이 됐다.”
이런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구단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98년 화이트삭스 트리플A에서 같이 생활한 삼성의 브리또는 그에게서 전수받은 타격 폼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해하고 있다.
“처음에는 배포된 자료를 통해 한국에서 홈런왕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믿지 못하겠는지 테스트를 시키더라. 그때 10개 중 7개 홈런을 쳤다. 바람이 뒤에서 불었다며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다음날 한 번 더 시키기에 또 7개를 쳐버렸더니 더 이상 군말이 없어졌다. 그때 마이너리그에 있던 선수들의 입을 통해 이 만수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쯤 돌아와 모국의 후배들을 지도하게 될까. 그가 복귀한다면 영원한 삼성맨이었던 탓에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그러나 그는 “모든 가능성을 항상 열어 놓고 있다”면서도 아직도 선진야구를 체득하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만수가 본 ‘선진야구’의 핵심은 선수 개개인의 기술이나 전략이 아니다. 야구를 할 수 있게 ‘밀어주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고 한다.
“히딩크의 파급력을 보면서 ‘야 이제 스포츠 환경도 좀 변하겠구나’했는데 아직까지는 좀 실망스럽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국 야구를 믿고 사랑한다”며 “히딩크처럼 선수 개개인에 대해 철저히 아는 것이 선진야구의 첫걸음”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한국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아쉬운 점도 많다고 한다.
“한국 야구도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팬들에 대한 배려를 각 구단들이 좀더 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선수가 팬들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돼있다. 팬들의 수준을 믿자. 축구 봐라. 철망 없어도 팬들이 사고를 일으키더냐. 하지만 야구는 팬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야구장에서 사탕 주듯이 추첨해서 팬들에게 선물주는 건 옛말이다. 좀 연구를 거듭해서 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 코치는 경기 도중의 잦은 어필도 경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타임하면 딱 1분 안에 해결하고 내려간다. 또 며칠 전에 심판에게 어필하다 심판 몸을 건드렸다는 기사를 봤는데 심판의 권위를 좀 더 존중했으면 좋겠다. 3∼4시간씩 걸리는 지루한 경기를 누가 보겠는가.”
그의 홈페이지를 보면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골수 팬들이 많다. ‘팬들이 보내주는 메일 하나하나가 삶의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고국의 정을 그리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2일 경기를 위해 19일 새벽 다시 고국을 떠난 그는 잦은 원정경기에 몸과 마음이 지쳐보였지만 올스타전을 보는 동안 검게 탄 얼굴에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