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월드컵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 있었던 평가전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한 채 후반부터 벤치 뒤에서 몸을 풀던 선수. 몸만 풀었지 결국 투입되지 않자 나중엔 몸 풀기를 포기하고 뒷짐을 진 채 그라운드만 바라보고 있던 그 얼굴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빠부대’의 화려한 인기를 등에 업고 그라운드의 ‘황태자’로 불리던 ‘라이언 킹’ 이동국(23·포항 스틸러스)은 히딩크 사단에서 이빨 빠진 맹수로 전락한 뒤 씻지 못할 상처를 받고 말았다.
마음은 헛헛하게 흘러가도, 운동을 쉴 수는 없는 일. 최순호 감독의 특별 조련 덕분에 모든 잡념을 훈련을 통해 풀어내려고 기를 썼다. 개인적으로는 온전한 기쁨과 감동일 수 없었던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오로지 K리그가 개막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동국이 건재하다는 것, 어떤 시련에도 끄떡없이 살아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K리그가 개막되면서 비로소 이동국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정규리그 3경기 만에 터트린 올해의 첫골은 그래서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20일 전남과의 경기를 앞둔 밤에 광양의 한 호텔에 묵고 있는 이동국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의 마음 고생과 앞날에 대한 기대를 들어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월드컵 엔트리 탈락 후 언론과 접촉을 뚝 끊었던데.
▲처음엔 무척 답답했다.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화도 났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불만만 늘어놓기엔 시간이 없었다. 계속 그래봐야 나만 손해보는 거지만, 감정이라는 게 생각처럼 쉽게 가라앉는 게 아니다. 지금은 프로팀에 처음 입단해서 유니폼 입었을 때의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사실 이동국, 고종수 선수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대표적으로 거론될 만큼 사생활에 관한 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알고 있나.
▲왜 모르겠는가. 정말 속상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도 않은 채 주위 사람 얘기만 듣고 기사화한 기자들도 문제다. 당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 선수가 몇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종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화제가 됐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운동을 그르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안마셨다고는 하지 않겠다. 젊은 기분에 놀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술을 먹지 않고 술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폭음을 했느니, 새벽까지 술을 마셨느니 하는 근거없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최근에도 포항에서 훈련중이었는데 서울에서 술 먹고 다닌다며 내 거취를 확인하는 문의 전화가 오기도 했다.
▲ 이동국이 정규리그서 두 골을 기록했다. 사진은 지난 13일 부산 아이콘스와의 경기장면.[대한매 일] | ||
▲기분 좋은 일 아닌가. 내가 유명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사가 나올 수 있겠나. 내 경험을 통해 신문에 나는 열애설의 70∼80%가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이동국은 열애설의 사실 유무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는 것 같아 참아왔다. 월드컵 경기를 빠트리지 않고 보았는지, 보았다면 어떤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한국팀의 플레이가 너무 좋아 담담하게 응원할 수 있었다. 그러다 결승전을 향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운한 면이 없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대표팀의 실력이 배가 아플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 월드컵이 또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월드컵 대표팀 선수들의 병역 면제 혜택 소식에 가장 속이 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 병역비리 혐의로 아버지가 구설에 오른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남을 축하만 할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프로생활 5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대표팀 생활을 해왔는데 가장 중요한 게임을 못뛴 대가로 병역면제 혜택에서 제외됐다. 그 심정이야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나. 아직 아시안게임이 남아있으니까 최선을 다한다면 뒤늦게라도 행운을 안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왜 대표팀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나.
▲히딩크 감독의 스타일에 못맞췄던 것 같다. 수비 가담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약점으로 인해 공격수 경쟁에서 밀렸다고 본다. 감독의 눈은 정확했다. 난 뒤늦게 나의 단점을 알게 됐고 소속팀에서 그 부분을 고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동국은 정규리그 개막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토로했다. 너무 오랫동안 게임을 뛰지 않다보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좀이 쑤셨다며 웃음을 흘린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 마음을 건드리는 몇 가지 질문에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몇 개월 사이에 이동국은 훌쩍 큰 것 같다. 월드컵의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이동국의 마음 한켠에서 자극제로 제몫을 톡톡히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