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진출의 위업은 분명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젠 그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봐야 할 때다. 월드컵이란 세계 축제 속에서 감춰지고 가려진 우리 대표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되짚어봐야 한다. 한국축구와 그 미래를 짊어질 선수들에게 전하는 축구인들의 고언을 싣는다.
[이상철 KBS 해설위원 - 체력 스피드에 정교함 더해야]
대표팀 선수들의 체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체력만 가지고 4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젠 정교함을 갖춰야 한다. 기동력, 스피드에다 정교함이 더해져야 하는데 정교함이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유년기 때부터 패스할 타이밍을 배워야지 대표팀에서 그걸 배우는 게 아니다. 히딩크 감독도 처음엔 이런 정교함을 키우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안되니까 체력과 스피드로 승부수를 띄운 것 같다.
▲ 지난 6월18일 벌어진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에 서 박지성이 드리블하고 있다. 특별취재단 | ||
월드컵 경기를 보면 이탈리아전을 중심으로 점점 우리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경기에서는 전후반 선수들의 플레이에 심한 기복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유가 뭘까. 아직 궤도에 올라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기 없이 정신력과 집중력에만 의존하는 경기를 하다보면 나사가 하나만 빠져도 조직력이 흐트러지는 결과를 낳는다.
젊은 선수들 몇 명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송종국이 보여준 투지와 체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자기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멋진 플레이에 대한 집착도 버려라. 이천수는 스피드가 가미된 드리블의 맛깔스러움을 살리지 못했다. 차두리는 실력과 위치 선정, 볼 받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박지성은 체력이 좋다고 하지만 예선리그보다 본선 때 훨씬 떨어지는 체력을 보여줬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체력을 키워야 한다. 또 패싱 능력을 기르고 미드필더에서도 롱킥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남일은 세계적인 수준의 기동력만큼은 인정한다. 거기에 경기 운영능력까지 갖춰진다면 루이스 피구도 부럽지 않은 톱클래스의 미드필더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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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4강 진출의 성적은 칭찬받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역효과도 분명히 있다. 우리가 4강 진출하기까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밟고 올라갔다면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의 4강은 어쩌면 16강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4강으로 국민들의 기대치와 축구를 보는 눈은 한없이 올라간 상태다. 그러나 유소년축구가 활성화되지 않고서는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확률이 높다. 어떻게 보면 16강 진출에 만족한 일본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번 냉정히 판단해 보자. 우리 선수들 정말 고생했다. 하지만 선수의 실력만 가지고 4강에 진출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번 월드컵이 다른 대회보다 보름 일찍 시작했고 5월 말 리그가 끝나자마자 대표팀에 합류해야 했던 유럽 선수들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무더운 날씨에다 생소한 아시아에서 경기를 치르다보니 제대로된 플레이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4강 진출에 들떠있기보다는 우리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이여. 지금은 흥청망청 놀 때가 아니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곰곰이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과 견주어 부끄러움이 없는지 자신만 알 수 있다. 지금 분위기에 도취되지 않고 자기를 진심으로 되돌아보는 선수들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선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여, 선수를 놓아주고 기다리자. 그들이 프로축구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끔 참아주자. 특히 연예인들은 선수들과 조금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 그들은 한국 축구를 짊어질 주역들이다. 더 이상의 ‘짝짓기’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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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다 멀게 된 것 같다. 너무 좋은 쪽만 부각돼서 잘못 얘기했다가는 매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선수들은 물론 국민들도 뒤돌아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너무 대표팀 위주로 분위기가 흐르다보니 프로리그가 소외된 느낌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성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선수들은 국민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환대와 박수를 받았다. 그에 대한 보답은 외부 활동이 아니라 그라운드에서 월드컵 때처럼 펄펄 뛰어다니는 파워 넘치는 기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선수들은 진짜 공인이 됐다.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적인 교분이나 만남이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빈번해서는 안된다.
논스톱으로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거나 수비수 한두 명을 제껴서 골문 앞으로 갈 수 있는 실력 부족도 큰 과제다. 실제로 16강, 8강, 4강에 올라갈수록 개인 기량에 의존하게 되는데 우리 선수들한테서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아마추어 감독으로서 우려되는 부분은 히딩크 감독이 강조했던 파워 프로그램을 유소년한테 접목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부상 위험이 큰 것은 물론 조로현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 유소년은 체력 부담을 버리고 골에 대한 감각만 키우면 된다.
잘한 일은 잘한 일이다. 지금은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어떤 자세와 준비를 통해 다음 월드컵을 대비하느냐에 따라 4강 신화가 더 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