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믹스트 존을 지나는 홍명보 선수에게 기자들의 질문공세 가 이어지고 있다. | ||
믹스트 존에선 선수가 ‘관중’이 되고 취재기자들이 ‘선수’가 되는 정반대의 현상도 벌어진다. 선수들은 엄격하게 차단된 칸막이 안에서 느긋하게 답변하는 반면 기자들은 선수를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멀티 플레이’를 펼치기도 한다. 선수들이 차에 올라타기 전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코스인 믹스트 존, 그 안에서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쏟아놓은 말들을 노컷으로 소개한다.
[독일과의 준결승전이 끝난후]
제일 먼저 나온 김태영, 경기에 져서 그런지 평소와는 달리 풀이 죽어 보였다. 그래도 김태영은 예의 ‘국민들’을 앞세우며 무척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놓고 만다. “수비로서 책임감이 상당히 컸는데 패스미스 한방에 무너졌습니다. 정말 국민들 앞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패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체력이 문제가 된 건 아닌가요?” “체력은 좋았는데 안맞아 돌아간 것 같아요.” “왜그랬을까요?” “(한숨을 내쉬며)모르죠.”
말을 하면서도 계속 씩씩거리는 김태영. 또다시 ‘국민 여러분’을 외치며 3· 4위전 준비 잘 할테니 계속 지켜봐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는다.
김태영이 지나간 뒤로 유상철이 애써 기자들을 외면하며 지나가려다 아우성에 가까운 항의를 듣고 들어가기를 포기한 듯 발걸음을 멈췄다. “독일의 골이 들어갈 때의 상황이 어땠습니까?” “난 명보형이 쳐내는 줄 알고 있었는데 명보형의 발의 각도가 변하면서 내가 준비를 하지 못했어요.”
“기대가 컸는데 막상 경기에서 지고나니 어떤 기분인가요?” 그걸 몰라서 묻냐는 식으로 질문한 기자를 쳐다보는 유상철. “좋을 리가 있겠어요?”라는 한마디를 내뱉고 자리를 뜬다. 물어본 기자의 얼굴엔 민망한 표정이 역력.
비교적 인터뷰에 열심히 응하는 박지성은 이날도 기자들의 표적이 됐다. “지성아,(박지성 등 나이 어린 선수들에게 대부분의 기자들은 말을 놓는다. 친근함의 표시일 뿐 다른 뜻은 없다) 맨 마지막에 슛 찬스가 있었는데 다른 선수에게 공을 양보하려고 한 거냐?”
“글쎄요, 뭐, 아니요. 양보가 아니라 내가 차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볼이 세게 오데요. 집중력이 떨어지다보니 미스 킥이 나온 거죠.” 월드컵 경기의 첫 패배가 선수들에게 안겨준 충격이 꽤 컸나 보다. 유상철에 이어 박지성도 어두운 표정으로 기자들 앞을 지나가버린다.
그때 나타난 우리의 황선홍.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간성 좋고, 매너 끝내주기로 소문난 황선홍이 나타나자 잠시 휴식을 취하던 기자들이 삽시간에 몰려들다가 칸막이가 넘어지고 부서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소감을 묻자 황선홍다운 멘트가 이어진다.
“아쉽죠. 요코하마 가지 못한 게.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경기하면서 보니까 독일팀 선수들이 굉장히 여유가 있더라고요. 우리가 정상 컨디션으로 해봤으면 한번 해볼 만한 상대였어요. 워낙 몸이 지쳐 있다보니까 힘든 경기를 치렀죠.”
▲ 믹스트 존은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선수들이 반드시 거치 는 공동취재구역. 기자들은 여기서 선수들로부터 한마디 라도 더 듣기 위해 열띤 경쟁을 벌인다. | ||
경기중 코를 다친 김태영.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는데 4강 진출 사실 때문인지 목소리가 흥분 상태다. 그의 멘트를 그대로 옮겨본다.
“(하이톤으로) 이 모든 게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 때문입니다. (흥분되다 못해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국민 여러분, 저흰 해냈습니다. 다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코는 어떻습니까?” “코요? 지금 만지면 아퍼. 아까 헤딩을 몇번 했더니 골이 띵하네.” “외국 언론에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보고 약물 복용 운운하던데.”
“약 먹었냐구요? 산삼 먹어서 그래요. 산삼. 하하”기분 좋은 김태영. 기자들이 몰려 있는 다른 코너에 가서도 또 다시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를 외친다. 이 정도면 국민에 대한 경외심이 프로급 아닐까.
마지막 키커로 나섰던 홍명보도 다른 때와 달리 유난히 들뜬 표정이다. “마지막 승부차기 하는 순간 떨리지 않았나요?” “긴장 많이 됐지요. 내가 어렸을 때는 페널티킥에서 전문 키커였는데(웃음) 안찬지 굉장히 오래됐거든요. 근데 오늘 오랜만에 PK를 찼고 그것도 마지막 순서를 배정받아 정말 떨렸어요. 어제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승부차기 선방으로 히어로로 떠오른 골키퍼 이운재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다가 기자들의 집요한 요구에 이내 포기한다. “호아킨의 볼을 막은 순간의 상황 좀 설명해주세요.”
“내가 선방한 게 아니라 그 선수가 못차서 막은 거예요. 잘 차는 선수 건 못막게 돼 있어요. 그 선수가─텔레비전 보면 알 거예요─내 앞의 1미터 안에 공을 찼기 때문에 잡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잡을 수가 없어요. 그가 실수한 거라니까요.”
연장전 들어가면서 승부차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는 이운재는 승부차기의 긴장감에 따른 후유증 탓인지 또다시 아무 생각이 없다며 그냥 들어갔다.
▲ 김태영(왼쪽), 이영표 | ||
연장전까지 치른 선수들은 입 뻥긋할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그중 유독 지친 표정이던 유상철이 그래도 기분이 좋은 듯 ‘립 서비스’를 아끼지 않는다.
“믿기지가 않아요. 진짜로. 그게 다예요. 근데 지친 것은 사실인데 진다는 생각은 전혀 안들었어요.”
이탈리아의 빗장 수비가 아무리 견고해도 후반 들어선 우리가 체력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유상철은 다양한 질문에 대답을 해나가다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한다. “저 조금만 가서 쉬면 안될까요?”
이영표의 인터뷰는 매우 독특하다. 독실한 크리스천답게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일단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팀과 함께 하신다는 것 느꼈고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런 역사를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연장전에서 체력적인 부담이 큰 짐이 됐을텐데 어떻게 극복했냐?” “(잠시 생각하다 결심한 듯) 그것도 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역시 ‘독실한 신자’ 이영표답다.
마지막에 등장한 황선홍. 과연 어떤 말을 할 것인가.“그냥 뭐 평가전 한 게임 끝난 기분이에요. 후반 30분 남겨놓고 들어갈 때 1점 뒤지고 있어서 부담이 많이 됐지요. 내가 어떻게 경기를 해야할 지를 고민했는데 아무 생각도, 방법도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열심히 하자. 죽기 살기로. 질 땐 지더라도 후회없이 뛰자 그랬죠. 기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11명이 뛰는 게 아니라 5천만 국민이 다 같이 뛰고 있기 때문에 뭐 세계 어느 강팀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말솜씨라면 황선홍을 국회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