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으로 흥하고 ‘검은돈’으로 망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지난 4월 30일 공개 처형을 당했지만 북한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연합뉴스
김정은 시대 전까지만 해도 현영철은 결코 눈에 띄는 인사는 아니었다. 그의 출신 성분과 관련해선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김일성의 호위병 출신이자 과거 국방위원회 국장을 맡았던 거물 현철해와 함경남도 당 책임비서를 지낸 현철규의 친척이란 얘기도 나돌았지만 이는 아직 확실치 않다.
현영철은 함경북도 어랑 출신으로 전해진다. 17세에 병사로 군에 입대했다는 정보가 있고, 통신군관학교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출신으로 아마도 통신병과에 정통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여 그가 1992년 장성급 간부인 소장으로 임명됐을 때 직책은 군 총정치국 통신국장이었다. ‘현영철’이란 이름 석 자가 대내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2003년 상장으로 진급해 8군단장으로 임명됐을 시기다.
현영철이 힘을 키우게 된 배경을 놓고 볼 때, 8군단장 임명은 일생일대의 기회가 됐다. 그 기회란 바로 현영철이 ‘돈’을 만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현영철을 키운 힘의 8할은 바로 ‘돈’이고 당시 무섭도록 성장하기 시작한 북한의 시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8군단은 신의주를 거점지역으로 북-중 접경지역인 평안북도와 자강도를 관할한다. 단순히 생각하기에 이 지역은 북한의 중심 평양과는 너무나도 먼 변방 중에 변방이다. 허나 핵심은 그곳이 경제 대국인 중국과의 ‘접경지대’라는 것에 있다. 바로 북한 시장 활성화의 바탕은 중국과의 밀무역에 있었다.
더군다나 해당 지역은 구리와 농수산물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1차 생산 및 수출품이 나오는 곳이었다. 단순한 접경지대를 넘어 이른바 경제적·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한 셈이었다. 한 마디로 이곳은 ‘돈’이 되는 곳이었다. 북한의 대외공개무역 70~80%와 밀무역의 60% 이상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물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이 지역 고위급 간부들은 이 밀무역을 바탕으로 한 지하경제를 젖줄삼아 야금야금 부를 축적해 갔다. 도당 보위부장도 도당 책임비서도 도당 경제비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영리한 현영철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간부들보다 돈을 벌 여건은 더욱 좋았다. 현재는 북-중 접경지대를 지키는 경비부대의 관할이 국가안전보위부로 넘어갔다지만, 당시만 해도 이를 관할하는 주체는 ‘군부’였다. 현영철은 접경을 오가는 밀무역의 현장을 지키며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문지기 역할을 통해 눈을 꾹 감고 받아 챙긴 밀무역의 검은 돈이 그의 부를 살찌게 했다.
현지 지역 고위급 간부들의 정례 회의인 ‘도당집행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이 회의에는 도당의 책임비서, 조직비서, 선전비서, 농업비서, 경제비서, 보위부장, 인민위원장, 농촌경제위원장, 검찰소장, 재판소장, 그리고 지역 관할 군단장 등 대략 10여 명이 모여 도내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현영철이 8군단장으로 있었을 당시 워낙 군부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던 터라 그의 힘은 도당집행위원회의 의사결정 단계에서도 매우 막강한 입김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이 지역에서 큰 일이 터진다. 이 시기는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김정은이 막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이었다. 중앙에서 밀무역을 젖줄 삼아 이미 통제 불능의 부패 상태까지 간 이 지역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도당 선전비서와 조직부장이 해임 철직되고 인민위원장 등 10여 명의 도당급 주요고위간부들이 차례로 강등됐다.
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역의 고위급 간부가 바로 현영철이었다. 아니, 되레 그는 이 시기에 영전하여 중앙무대로 진출하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아주 역설적이면서도 간단하다. 현영철은 다른 간부만큼,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부패 자금을 착복해 힘을 키웠지만 더 많은 충성 자금을 김정일과 김정은에 올렸기 때문이다. 현영철은 돈 욕심만큼이나 권력욕 역시 남달랐던 인물이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도 결국 변방의 이 충성심(?) 높은 군 간부를, 그것도 꽤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내치긴 쉽지 않았을 터다.
한 일례로 과거 언젠가 김정일이 군 관련 주요 간부들을 만나는 행사를 할 당시, 대부분 인사치레로 군 간부들과 악수를 건네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꼭 현영철만은 아주 반가워하며 행사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환담을 나누었다는 목격담이 오갈 정도였다.
그 뒤로는 한 마디로 탄탄대로였다. 현영철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장을 거쳐 2010년 9월 김정은, 김경희, 최룡해 등과 함께 대장계급을 수여받게 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때 공식적으로 대장 진급을 명받은 인사들은 김정은 시대를 상징하는 ‘실세’들의 명단이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2012년 7월 숙청된 리영호의 뒤를 이어 북한 군 3대 권력 중 한 자리이자 최대 명예인 총참모장에 오른다. 그 시기부터 북한 내부에선 현영철을 두고 김정은의 군 관련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갔다.
그런 현영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2013년 5월 김격식에게 총참모장직을 넘기고 2014년 6월, 인민무력부장으로 임명됐던 시기부터다. 현영철을 유독 중용했던 김정은은 군 권력구도 개편에 있어 인민무력부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다. 김일성 시절, 군 행정권을 통솔하는 인민무력부장 자리는 군 최고실세 자리였다. 분명 당시만 해도 인민무력부장은 당적지도를 담당하는 총정치국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총참모장을 압도하는 자리였다.
2013년 1월 당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주재한 ‘국가안전 및 대외부문 일꾼협의회’에 현영철 군 참모총장(맞은 편 오른쪽)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오진우가 사망한 이후 최광이 총참모장을 할 때부터 김정일은 조용히 견제 구도를 만들었다. 선군정치를 내세운 김정일의 지도시기에 들어 점차 총참모부가 인민무력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인민무력부장은 군 3직 중 가장 약화됐다. 그런 인민무력부에 김정은이 다시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선군정치로 피로를 느낀 체제로 말미암아 김정은 나름대로 변화를 준 결과였다. 즉 권력구도에 있어서 가장 안정기였던 조부 김일성 시대로의 회귀를 꾀한 것이었다. 김정은은 이 시기 인민무력부의 권력을 상향조정하는 한편, 총참모부와 정찰총국을 인민무력부 산하로 직속시키고자 하는 시도까지 했다.
현영철은 자신에 힘을 실어주고 중용하는 김정은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간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복종하며 ‘예스맨’으로서 위치 선정에 들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결과적으로 현영철의 목숨을 날아가게 한 주요 배경이 된다.
필자가 현영철 처형 직전 입수한 몇 가지 정보는 그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북한군을 비롯한 관료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 및 제거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인민무력부가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인사시스템에까지 개입하려는 수순에 들어가자 총참모부와 총정치국을 비롯한 현영철과 인민무력부에 대한 견제 세력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친러 성향이 짙은 현영철에 대해 친중 성향의 인사들까지 그 작업에 가담했다는 후문이다. 참고로 현영철은 수차례 러시아를 오간 친러 인사로 지난해 11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예방했던 북한 대표도 역시 그였다. 중국과 러시아를 두고 등거리 외교를 펼쳐야 하는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국 친중과 친러 인사로 이분화된다. 친중 인사들로서는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깊은 현영철이 커가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이는 자신들의 밥줄을 위협하는 위험한 수순이었다.
현영철의 또 한 가지 패착은 김정은 이외에 주변을 전혀 살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 권력이었던 김정일과 비교한다면, 김정은은 분명 틈이 있었다. 그리고 그 틈 탓에 북한 내부의 권력구도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다. 현영철은 그 주변의 변화된 환경을 감지하지 못한 듯하다.
앞서의 견제 세력들이 지난 2월경, 그의 부패 이력을 첨부한 제의서를 김정은에 올렸다. 당연히 현영철의 제거를 종용하는 내용이었다. 그 구체적인 부패 이력은 아직 명확치 않지만 (다른 간부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오랜 기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해온 현영철의 어두운 단면이 결국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확실하다.
필자가 현영철의 처형을 전후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지난 4월 13~20일 사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제4차 국제안보회의 출석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인지했다. 당시 현영철의 해외출장을 보좌한 것은 그의 기존 보좌 인사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현영철의 이탈을 염려한 김정은은 그의 밀착 감시를 명하며 자기 사람들을 붙였다.
독자들 중에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김정은은 이미 처형을 염두에 둔 현영철을 굳이 러시아에 대표단으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김정은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주변의 견제세력에 의해 그의 처형을 요구하는 제의서가 전달되기 이전, 이미 러시아에 대표단으로 현영철을 보낸다고 통보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친러 성향이 강한 현영철의 방문을 중간에 취소한다면, 러시아로서는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뿐 아니라 국제사회 역시 북한의 권력구도에 이상을 감지하고 평양에 신경을 집중하게 하는 꼴이 된다.
러시아 출장을 다녀온 현영철이 김정은과 동석한 회의에서 조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국제사회에선 그가 불경죄로 처형됐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이다. 단순히 찰나의 일탈을 갖고 최고위급 간부를 단칼에 친다는 것은 아무리 독재국가라고 해도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4월 30일 기관총으로 공개 처형을 당한 현영철은 그의 혈육들 앞에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당시 김정은은 처형 현장에 군 총참모부를 비롯한 핵심 권력기관 인사들을 총집합시켰고, 그 자리엔 현영철의 혈육들 역시 동석시켰다는 후문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