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치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태극전사들의 가슴엔 안타까움 과 부러움이 교차한다. 10일 미국전 한국 벤치의 모습으로 최은성 김병지 최용수 윤정환 등의 얼굴이 보인다. 특별취재단 | ||
부상했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선수들이 대부분으로 월드컵 시작 전만 해도 강력한 주전 후보들 중 하나였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선 미국전을 기대했고 미국전이 끝난 뒤엔 ‘혹시나’하는 마음에 포르투갈전을 기다렸던 그들.
한국팀이 월드컵 첫승을 이룬 뒤 새로운 신화를 탄생시킬 때마다 그라운드의 전사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감격을 나누지만 승리의 기쁨이 지나간 자리에선 표현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부러움 등이 이들의 몸과 마음을 헤집고 다닌다.
이운재와 가장 치열하게 자리 다툼을 벌인 골키퍼 김병지(31·포항)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김병지를 꽤 오래 알고 지내왔지만 그가 인터뷰를 거절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마음 고생이 크다는 뜻이다. 기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이어가자 대답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도 조금씩 속내를 드러냈다.
“대표팀의 기대 이상의 선전은 분명 축하할 일이고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선수들 마음은 온전한 기쁨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요즘엔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다.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줄 때는 ‘벨도 없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간만 표정이 어두워도 속상해 그런다고 건네짚는다.”
김병지는 폴란드전에서 이운재가 선발 출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컨디션이 워낙 좋아 히딩크 감독의 콜 사인을 크게 기대했기 때문.
“사실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놀란 것도 사실이다.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좋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
▲ 왼쪽부터 김병지, 윤정환, 최용수 | ||
“게임 못뛴다고 인상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물론 아쉬움은 많지만 주전 선수들과 함께 열심히 훈련에 참가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한국팀이 4강에까지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차곡차곡 승리를 챙겨가며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해낼 때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고 가슴이 벅차 오른단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단답형식으로 대화가 오가다가 4년 뒤 독일 월드컵을 기약하자고 말하자 윤정환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난 더이상 대표팀에 미련이 없다. 이걸로 만족한다. 주전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한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앞으론 대표팀에 연연하기보다 소속팀으로 돌아가 팀을 위해서 남은 축구인생을 다하고 싶다.”
23명의 엔트리에 오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 마음고생, 온갖 스트레스 등의 험난한 통과의례를 거친 뒤의 자리가 벤치밖에 없다는 사실이 태극마크에 대한 미련조차 떨쳐내는 것 같다.
지난번 스페인전이 끝나고 경기장에서도, 숙소에서의 자축 파티에서도, 누구보다 기뻐하고 흥에 겨워했던 선수가 다름아닌 최용수(29·이치하라)였다. 허리 부상으로 미국전 후반에만 ‘잠시’ 출전했다가 그나마 상대 선수의 발차기에 허리 아래 부분을 크게 다친 그는 그후로 훈련조차 참가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지만 독일전을 앞두고는 그라운드에서 조금씩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한때 아시아 최고의 골게터가 ‘비운의 스트라이커’로 전락하는 데에는 말못할 속사정도 숨겨져 있다. 이상하게도 히딩크호에서의 최용수는 골게터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소속팀으로 돌아가면 가공할 만한 득점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상한 징크스로 굳어져 버렸다.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내심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였다.
“월드컵과는 아무래도 인연이 없나 보다. 프랑스월드컵 이후 오직 2002월드컵만 기다리며 달려왔는데…. 좌절감, 미안함, 죄스러움 등이 복잡하게 오가지만 그래도 난 한국의 4강 진출이 너무 기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