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실력이 떨어지면 남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려는 의지다. 그런 점에서 한국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그러한 한국축구의 잠재력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 사진=특별취재단 | ||
─2002년 5월26일 프랑스 평가전을 마치고 네덜란드 <드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히딩크가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오기 전 우리나라 축구는 최악이었다. 아시아 최강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진 사이 일본과 중동세에 밀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월드컵을 1년 8개월여 앞둔 지난 2000년 10월 말 대한축구협회는 해외의 특급 감독 ‘수배’에 한국축구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으로서 안방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처방전’에는 에메 자케 전 프랑스 감독과 거스 히딩크 전 네덜란드 감독의 이름이 올랐다. 결국 히딩크 감독이 낙점돼 지난 2000년 12월17일 김포공항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로부터 정확히 5백30일 지난 뒤 월드컵 개막식과 함께 히딩크는 세계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됐다. ‘명장’은 ‘명언’을 남기는 것일까. 그간 히딩크가 한국축구에 던진 베스트 어록과 함께 한국축구대표팀의 5백30일 대장정을 되짚어본다.
“만약 한국선수들에게 대뜸 나무에 올라가라고 지시한다면 그렇게 하겠는가.” ─2000년 12월 초 히딩크가 축구협회와 계약조건을 협의할 때 한국선수들의 자세를 알아보기 위해 가삼현 국제부장에게 던진 질문.
“한국 관계자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접근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큰 보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국이 경기에 지기는 했지만 한국민의 축구에 대한 애착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2000년 12월 한국대표팀 감독직 수락 배경에 대해.
“한국사람들은 규정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2001년 2월11일 아랍에미리트전 뒤 한국기자들의 ‘4-4-2’와 ‘3-5-2’ 포메이션 논쟁이 의미 없다며. 규칙에 얽매이다 보면 창의적인 사고나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
“내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선수는 똑똑한 선수다. 경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선수들이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멍청한 선수’가 되지말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판단력있는 선수’가 돼야 한다.” ─2001년 5월2일 KBS-TV <클로즈업 오늘>에 출연해서.
“어느 정도를 원하나. 머리라도 빡빡 밀어버릴까.”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98년 도요타컵 우승 후 수염을 깎았는데 한국을 월드컵 16강에 진출시킨 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고 묻자.
“여론을 수렴하다보면 내 축구철학이 흔들릴 수 있고, 전술적인 완성도가 방해받을 수 있다. 나는 오로지 나의 길을 간다.” ─2001년 4월 말 이집트 4개국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 구성에 대해 묻자 ‘언론에 흔들리지 않겠다’며.
“많이 맞아봐야 겁이 없어지고 배짱도 생기기 때문.” ─2001년 8월 체코 원정경기에서 0-5로 질 때 후반에 수비강화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달리는 말에 채찍질도 좋지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 ─2002년 1월1일 신년 포부를 밝히며.
“판소리 음악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것이라면 존중해야 한다.” ─2002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으로 말하자면 현재 43위에서 세계 10위 내지 15위까지 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한국대표팀은 젊은 팀이다. 경험을 쌓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술을 가다듬는다면 세계 수준의 팀이 될 것이다.” ─2002년 2월4일 북중미골드컵축구대회를 4위로 마감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감을 내비치며.
“약팀과의 승수쌓기는 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려운 길을 택했다. 한국 축구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2002년 2월16일 남미 전지훈련을 마치고 ‘한국선수들을 위해 값싼 승리보다는 강팀과 맞붙는 험난한 길을 택했다’며
“나는 수학자가 아니라서 확률은 모른다. 지금 16강의 가능성을 50%로 생각하고 남은 50일 간 매일 1%씩 확률을 높여나가 개막 때는 100%로 만들겠다.” ─2002년 4월10일 월드컵 개막일 50일을 남겨놓고.
“더도 말고 딱 1년만 일찍 대표팀을 맡았더라면 하는 마음.” ─D-50일에 ‘트루시에 일본대표팀 감독이 3년이 넘도록 지도한 것과 견주면 시간이 부족하다다’며.
“우리는 반란의 주인공이길 바란다.” ─2002년 6월2일 ‘세네갈이 프랑스를 물리치는 이변을 연출한 것처럼 한국도 세계적인 팀들을 이길 수 있다’며.
“제대로 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돌아왔다.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 틀리지 않았다. 나는 한국민을 사랑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첫 승리를 염원했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한 발자욱을 뗐다.” ─6월4일 폴란드전을 이긴 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기사에만 내 이름이 실렸는데 최근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에서 내 이름이 인용되는 것으로 듣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작은 독재자’로 만족한다.” ─2002년 6월4일 폴란드에 승리한 뒤 네덜란드 기자들에게.
“땀으로 그들과 대화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데 선수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찾기를 권한다.” ─2002년 5월23일 어느 외신기자가 ‘나이지리아 출신 애인과 결혼할 것인가’라고 묻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경기에 진 팀은 거울을 보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진 팀이 심판 판정을 패배의 원인으로 돌리는 데 대해 반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