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전 승부차기의 영웅 수문장 이운재(29·수원)는 독일전을 앞두고 가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골키퍼 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 직전에 상대 선수, 특히 자웅을 다투게 된 같은 포지션의 선수에게 이토록 찬사를 보내는 선수도 드물 것이다.
당시 청주상고의 유인권 감독은 어느날 이운재를 불러 “너 골키퍼 할래, 아니면 운동 그만둘래”라며 단도직입적으로 선택을 요구했다.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체중을 줄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골키퍼의 길을 가야 했다.
고3에 올라가면서 이운재의 숨은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국대회에서 창단 최초로 우승 3회, 준우승 2회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둬버린 것. 당시 대학 진학은 전국대회 성적에 따라 좌우됐다. 청주상고는 백상체육대상 단체상까지 휩쓸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고 진학문제는 더이상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운재는 경희대 진학 후에도 전국대학선수권대회에서 승부차기 승과 인연을 많이 맺었다고 한다. 평소 승부차기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부분이다.
이운재와 김병지의 태생적인 차이점이라면 이운재가 청소년대표팀만 빼고 골고루 태극마크를 달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데 비해 김병지는 무명에서 반짝 스타로 떠오른 신화 탄생의 주인공이란 점이다. 확연히 다른 개성차이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를 가르기가 힘든 두 사람이지만 코칭스태프와 동료 선수들은 이운재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성실과 근면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운재의 평소 행동이 높은 신뢰와 안정감을 줘왔고 이운재 또한 선배이자 영원한 라이벌인 김병지와의 경쟁에서 한 번은 먼저 발을 내딛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사실 폴란드전에 나갔을 때까지도 내가 주전이 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물론 기대는 했겠죠. 그러나 혹시나 싶은 생각에 맘을 놓지 못하다가 경기 전날 출전 멤버 명단을 알게 됐어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힘들고 피말리는 주전 경쟁에서 제가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운재는 대학 3년 때 94미국월드컵에 첫 출전했다. 당시 주전 골키퍼였던 최인영의 불안한 실수로 인해 독일전에 후반 교체 투입이 단행됐고 그 바통을 이어 받은 선수가 이운재였다. 독일전에서 이운재는 마테우스의 슈팅을 막아내는 등 선방으로 무실점의 호성적을 나타냈다. 물론 2-3의 점수차로 아쉽게 분패했지만 이운재란 이름 석자를 세계 무대에 각인시켜준 계기가 됐다.
그러다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앞두고 2회 연속 월드컵 출전을 내심 기대했지만 이운재는 막판에 김병지, 서동명에 의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한동안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염과 폐결핵까지 발병되며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운재의 시대가 피지도 못하고 저물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어렵게 잡은 2002월드컵은 이운재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였다. 김병지와의 치열한 자리 다툼이 고비였지만 마냥 사람 좋게 양보할 수만은 없는 상황.
“월드컵을 앞두고 대부분 언론이 김병지 선배가 주전으로 낙점될 것이라고 했어요. 사실 여부를 떠나 나에겐 ‘비보’였고 섭섭했죠. 폴란드전에 첫 출전할 때는 혹시나 싶었는데 미국전에까지 선발 출전되면서 비로소 주전이 됐구나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아내 김현주씨와 이운재는 힘든 시련을 겪었다. 98년 결혼 후 첫 임신에 기뻐한 것도 잠시, 곧 유산되어 두 사람을 비탄에 젖게 한 것. 아내의 약한 몸이 원인이었다. 누구보다 남편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묶여 있는 몸’ 이운재로선 아내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아내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리라 믿고 눈 코 입 꽉 막고 오로지 월드컵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이탈리아전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연장 후반전에서 비에리가 골문을 향해 돌진해올 때는 정말 아찔했어요. 골든골 먹는 줄 알았으니까요. 아, 월드컵. 정말 신나고 감격적인 대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