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영(왼쪽), 황선홍 | ||
편법으로 갔어도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며 ‘코리아의 힘’을 보여준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 속에서 방황하다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에이전트와 손잡고 해외진출을 시도했던 선수들의 실패담을 통해 문제점을 되짚어본다.
[김태영]
최근 잉글랜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입단에 실패한 ‘아팟치’ 김태영은 아직도 잠을 설친다.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후 나타난 일종의 ‘화병’이다. 이적료와 지난해 초 전남과 맺은 2년 계약이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팀에 오랫동안 봉사했다는 점과 과거 구단측이 J리그 진출을 무산시킨 전례를 떠올리면 서운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전화선을 찢을 만큼 우렁차다.
“속에선 울화가 치민다. 사실 유럽 진출은 선수들의 평생 꿈 아닌가? 이번에도 팀에서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김태영은 ‘축구계의 최민수’답게 조용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몸 좋고 잘 뛰는 ‘놈’은 ‘알아서’ 이적료 많이 주고 데려간다.”
[황선홍]
90년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월드컵 사상 첫 승리의 축포를 안긴 황선홍. 그도 지난해 8월 터키 트라브존스포르 입단 불발로 가슴을 쓸어 내려야만 했다. J리그 가시와 레이솔을 떠나 일시 귀국해 미국행을 준비하려던 그는 지난해 8월27일 H스포츠로부터 트라브존스포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터키 1부 리그가 34세 노장의 잠을 설치게 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고심 끝에 이틀 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날아간 터키였지만 시작부터 연봉과 계약 기간에서 양측의 견해 차이는 컸다. 충분한 의견 교환을 하지 못한 채 협상 테이블에 앉았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황선홍은 당시 냉철함을 잃었던 점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그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며 “선수 생활을 연장하고픈 마음이 앞서 구체적인 계약 조건과 주변 상황을 둘러보지 못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황선홍은 “1백원을 받든 1백억원을 받든, 몸값에 대해 선수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분명히 오버”라며 “에이전트를 믿고 따르되 선수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이적 전후의 득실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오스트리아에서 잠시 뛰었던 한국축구의 ‘명품 수비수’ 강철도 진출과정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 ||
강철은 ‘월드스타’ 홍명보에 견줄만한 대형 수비수다. 2001년에는 오스트리아 라스크 린츠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언뜻 봐서는 ‘해외 진출 실패’와는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그에게도 아찔한 순간은 있었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2000년 12월27일. 강철은 세계 올스타와 한·일 프로 올스타와의 경기를 위해 일본에 머물던 중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구단(부천)에서 이적하래. 국내, 일본말고 유럽으로.”
몇 년간의 치열한 연봉 줄다리기에 ‘존심’을 억누르던 구단이 결국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었다. 강철은 “멍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따지기도 전에 독일로 날아가야 했다. 대부분의 유럽 리그 선수 등록 만료일이 1월15일까지였기 때문”이라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테스트를 전혀 받지 못했다. 모든 구단이 이미 선수 영입을 완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의 선수 등록 기한은 1월31일까지였다. 우선 오스트리아를 노려보고 안되면 벨기에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라스크 린츠가 나를 필요로 했다.”
[김도근]
97년 차범근 사단에 뽑혀 8월10일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그림 같은 왼발 터닝슛을 성공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터프가이’ 김도근 역시 해외 진출 이야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는 케이스. 잉글랜드 웨스트햄 파동으로 한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잉글∼’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가 무섭게 “무조건 믿었던 것이 잘못”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김도근은 에이전트 최아무개씨의 소개로 99년 2월23일 영국으로 날아갔다. 동행자는 당시 최고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던 ‘독수리’ 최용수였다. 최용수는 5백만달러 이상의 이적료를 받을 것이라는 보도들로 인해 국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인만 하면 입단이 확정된다”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현지에 도착했으나 이게 웬일인가? 구단 관계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I don’t know”만 실컷 배우고 왔다는 김도근은 “비행기를 탈 때부터 썩 내키지 않았다”면서 “도착해보니 우리가 오는 것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적 건과 관련해서 7∼8명의 현지 중개업자들이 얽히고 설키었다는 사실. 김도근은 “웨스트햄측에선 테스트는 둘째치고, 데려갈 마음도 없었다”라며 씁쓸해 했다. 그는 이후에도 몇 차례 해외 진출을 노렸으나 구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재영 베스트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