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21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몸싸움을 벌 이는 최진철 선수. 사진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렇듯 수비수는 똑같은 베스트 11이라고 해도 ‘차별대우’를 받는다. 홍명보를 제외하곤 언제나 공격수의 그늘에 가려 있다. 하지만 완벽한 수비만이 최상의 공격을 가능케 한다. 지난번 폴란드전만을 놓고 보더라도 수비수들의 단단한 저지선이 없었다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경기였다.
홍명보 최진철 김태영으로 짜여진 완벽한 콤비네이션이 있었기에 유럽 장신의 파상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드러나진 않지만 묵묵히 자기 포지션을 잘 지키고 있는 대표팀 숨은 공신 3인의 축구인생을 따라가본다.
[더이상 쓴잔은 없다 최진철]
최진철(31·전북)은 소속팀에서도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전북이 강팀이 아닌 데다 포지션 또한 주목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 93년과 97년 두 차례에 걸쳐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발탁됐지만 부상과 감독의 신임을 받지 못해 번번이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축구협회로부터 대표팀 발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솔직히 반갑지가 않았다고 한다. 태극마크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터라 당시의 ‘러브콜’이 또 어떤 상처를 남겨줄지 걱정스러웠던 것.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최진철의 돋보이는 성실성과 체력, 근성을 높이 샀다. 몸싸움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으며 90분을 펄펄 날아다니는 체력 또한 큰 장점이다. 폴란드전은 생애 잊을 수 없는 멋진 한판 승부였다. 월드컵 첫 출전 경기에서 한국 축구의 숙원을 풀었고, 바로 그 현장의 주인공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것이다.
최진철은 요즘 ‘월드컵 특수’를 톡톡히 맛보고 있다. 숙소를 벗어나기만 하면 사인해달라고 몰려드는 팬들이 엄청나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그래도 행복하기만 하다.
▲ 이을용 | ||
이을용은 히딩크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무명선수나 다름없었다. 강릉상고에서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다 대학진학에 실패하게 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쌀 도매업을 하는 아버지 일을 도왔다. 무거운 쌀가마니도 아버지를 대신해 실어 날랐다.
축구와 담쌓고 지내기를 1년여. 고등학교 때 축구부 감독이 한국철도 이현창 감독에게 이을용을 천거해 테스트 없이 입단 허락을 받아냈다. 첫 월급이 80만원. 그것도 정규직 아닌 계약직이었다. 입단 보름 만에 출전한 첫 경기에서 이을용은 두 골을 터트렸다. 그러다 98년 드래프트 2순위로 부천 SK에 입단했다.
지난해 1월 히딩크호 1기 대표로 뽑힌 이을용은 불과 1주일 만에 왼쪽 무릎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5개월간 그라운드를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본선에선 이영표의 부상으로 주전자리를 꿰찬 이을용은 폴란드전에서 황선홍의 골을 어시시트하며 한국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미국전에서는 공수에 걸쳐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페널티킥을 놓쳐 옥에 티를 남겼다.
▲ 김태영 | ||
외국팀과의 평가전이 끝난 뒤 상대팀 선수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한국 선수를 꼽아달라고 하면 대부분 김태영(32·전남)을 지목한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저돌적이고 악착같은 플레이가 상대 공격수들의 혼을 빼놓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거칠면서도 조율할 줄 알고 세련되지 않아도 고도의 압박 수비로 상대의 거센 공격들을 몸으로 막아낼 줄 안다.
김태영은 어린시절 그다지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진학 때는 주전 한 명에 후보 두 명이 끼워서 가는 형식으로 금호고에 입학했는데 김태영이 바로 덤으로 포함된 ‘깍두기’ 몫이었다.
동아대 졸업후 국민은행에서 생활할 때도 큰 빛을 발하진 못했다. 95년 전남에 입단하면서부터 그의 축구인생은 비로소 ‘쨍’하고 해뜰날을 맞았고 꿈에도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대표팀에서 활약하게 됐다.
팬들이 공격수들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낸다면 그는 코칭스태프들로부터 두터운 믿음과 격려를 받는다. 역대 감독들이 모두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축구를 어렵게 시작했고 평탄치 않은 선수생활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터라 축구에 대한 소중함 간절함 자신감이 차고 넘치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