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 찍어 놓고 ‘쇼’ 하는 거 아냐?
저축은행중앙회장에 저축은행 경험이 전무한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오른쪽)이 사실상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이번 중앙회장 선출이 난항을 거듭하는 근본적 원인은 업계 스스로 회장을 선출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앙회뿐만 아니라 그동안 다른 금융협회의 회장 자리는 낙하산이 관행이었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금융협회장 자리는 기획재정부 과장급 이상의 인사 배출구”라고 말했다. 한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중앙회장은 기재부나 금융위원회 출신이, 부회장은 금감원 출신이 맡는 게 관행처럼 됐다”고 보탰다.
이 관행은 지난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관피아’ 척결을 천명하며 뒤집어졌다. 전국은행연합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등 주요 금융협회 수장 자리를 민간 출신이 꿰찼다. 이런 기조와 맞물려 중앙회도 이번에는 민간 출신을 선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사석에서 “이번 중앙회장은 업계 자율적으로 선출하라”며 “관료 출신, 그 중에도 금융당국 출신은 절대 불가하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한다. 때문에 사상 첫 ‘순수 저축은행업계 출신 회장’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회추위는 지난번 김종욱 전 부회장의 후보 등록을 부결 시키면서 “업계 경력이 짧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댔다. 김 전 부회장은 행시 출신이지만 짧은 공직 생활 후에 다양한 금융권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물론 회추위 말마따나 저축은행업계 경력은 2년 정도다.
그런데 재공고 이후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는 저축은행 관련 경력이 전무한 전직 시중은행장 3인으로,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 및 삼성생명 사외이사),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현 우리카드 고문)이었다. 한 회추위원은 “우리 업계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선뜻 나선다는 분이 없어 시중은행 출신까지 범위를 넓혔다”고 설명했다.
유력 후보 거론 직후 윤용로 전 행장은 행시 출신에 재경부(현 기재부) 등 관료 출신이라는 점이, 이건호 전 행장은 일명 ‘KB사태’로 징계를 받았던 점이 결격사유로 부각됐다. 때문에 이순우 전 행장이 가장 유력하다는 평이 흘러나왔고 급기야 사실상 차기 회장으로 내정됐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게다가 <일요신문> 취재 결과 윤용로, 이건호 전 행장의 회장 출마설은 어디까지나 ‘설’이었음이 드러났다. 윤 전 행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누구에게서도 (중앙회장 출마에 관해) 연락 받은 적 없다. 나는 중앙회장 적임자가 아니다”며 출마설을 일축했다. 이 전 행장 역시 “(회장 출마에 관해) 연락 받은 적도 없고 출마할 생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내순 전 대표, 김종욱 전 부회장
이순우 전 행장에 대한 화려한 정치권 인맥도 내정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 전 행장은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대구고 선배이며 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후배다. 또 이 전 행장은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2013~2014 시즌 여자프로농구(WKBL)에 우리은행이 타이틀 스폰서를 맡는 등 WKBL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WKBL 총재가 바로 최 부총리다.
일각에서는 “업계의 훌륭한 분들 중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회추위의 주장이 ‘이순우 회장 만들기’의 명분 쌓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종욱 전 부회장 부결 사태를 무마하고 잡음 없이 이 전 행장을 회장으로 영입하려면 전·현직 저축은행 대표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업계 관계자는 “금융지주사 회장 출신을 회장으로 모시기 위해 내놓은 (회추위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지난 15일부로 이 ‘명분’은 정말로 궁색한 변명이 돼버렸다. 이날 박내순 전 한신저축은행 대표가 후보 신청을 마쳤기 때문. 박 전 대표는 용산고와 고려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조흥은행 행원으로 2003년 부행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0년 넘게 시중은행에 근무했다. 곧바로 한신저축은행 대표로 자리를 옮긴 그는 지난해 12월까지 11년 동안 저축은행 업계에 몸담았다.
박 전 대표는 “중앙회장 재공모가 올라오자 업계 원로 두세 분에게 연락을 받았다”며 “그분들이 ‘모처럼 업계 자율로 회장을 선출할 기회가 왔는데 다른 업계 출신에게 내주면 안 되지 않겠느냐’며 출마를 권유하더라”며 “회장으로 선출된다면 현재 기본급과 판공비 등 7억 원에 달하는 과도한 회장 연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이미 한 번 고배를 마셨던 김종욱 전 부회장도 재도전을 숙고하고 있었다. 김 전 부회장은 “저축은행 업계 경력이 짧아 안 된다면서 시중은행장 출신을 회장으로 선출하려는 것은 모순”이라며 “후보 신청 마감일까지 두고 봐야겠지만 다시 후보 신청을 해 정식 후보가 돼 총회에서 정정당당하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중앙회장 후보신청 마감은 21일 오후 6시. 바로 다음날인 22일 회추위는 ‘본선’ 격인 총회 투표에 올릴 회장 후보자를 결정한다. 총회 투표는 79개 회원사의 대표들이 모여 28일 오전 11시에 열릴 예정이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