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은 중국내 권력 암투…김정은 ‘결단’
북한 걸그룹 모란봉악단의 중국 베이징 공연 취소 배경에는 중국 내부 권력 암투도 연관돼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10월 11일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모란봉악단과 공훈합창단의 합동 공연. 연합뉴스
북한 걸그룹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은 애초 12월 12일부터 14일까지 예정돼 있었다. 이번 공연은 중국 공산당의 선전선동 부문을 맡고 있는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의 노동당 선전선동부 1부부장인 최휘와 기획한 사안이었다. 둘 다 양국의 선전선동 부문을 맡은 책임간부였다. 류윈산은 북한 당 창건 70돌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 10월 9~12일 3박 4일간 일정으로 방북한 바 있고, 공연은 이 시기에 논의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류윈산의 방북을 두고 국내외에선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류윈산이란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류윈산은 7명의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사람이다.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포함해 7명의 상무위원은 사실상 중국 최고 의사결정권자라 할 수 있다. 류윈산의 중국 공산당 내 서열은 5위에 해당한다. 그는 지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선전부장을 역임하며 중국 내 모든 행사 기획에 참여하는 간부다. 지난 9월 3일 중국의 열병식 역시 류윈산이 기획에 관여했다.
문제는 류윈산과 시진핑의 관계다. 현재 7명의 상무위원 중 류윈산은 유일한 장쩌민(江澤民) 파의 일원이다. 류윈산을 제외한 리커창(李克强) 총리,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위정성(俞正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장가오리(张高丽) 부총리 등 나머지 5명의 상무위원은 현재 중국의 개혁세력이자 다수파인 시진핑 파의 일원이다. 애초 김일성대 출신으로 장쩌민 파이자 친북 인사로 꼽혔던 장더장은 현실적 이유로 현재 시진핑 파로 넘어간 상황이다.
장쩌민 파는 전통적으로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하며 일당독재를 주장하는 보수파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당 대 당 외교를 강조한다. 이 때문에 현재 북한과의 전통적인 당 대 당 우호관계를 강조하는 중국 고위급 인사는 지난 북한노동당창건일을 기념하기 위해 북한을 다녀간 류윈산이 거의 유일하다. 친북 성향이 강한 류윈산은 이미 북한과의 보통국가 관계를 표방한 시진핑 주석과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지난 12월 12일, 북한 모란봉악단의 공연 취소는 기획자 류윈산과 시진핑과의 관계가 큰 부분으로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애초 북한 당국은 해당 공연에 중국 상무위원들의 참석을 바랐다고 한다. 경색국면에 있는 북-중 관계를 뚫어야 하는, 특히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그토록 바라는 김정은의 입장을 여론화시켜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류윈산의 발의로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은 상무위원 회의에서 통과됐지만, 이 회의에서 중국 측은 상무위원단의 공연 참석은 못 박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기획자 류윈산의 참석이 예정돼 있었던 터라 북한 당국은 내심 상무위원의 참석 혹은 최소한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의 공연 참석 가능성을 높게 내다봤다고 한다.
중국 현지에서 흘러나온 베이징 공연장의 악단 리허설 당시 얘기는 현재 우리 국정원의 주장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현송월 단장(인민군 대좌)을 비롯한 관리일군 3명, 공연에 나서는 14명의 출정 단원으로 꾸려진 모란봉악단의 공연엔 실제 김정은을 비롯한 당 지도부를 추앙하는 내용과 형식이 존재했다. 특히 공연 초에 현장에 참석한 당 간부들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파트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에선 이러한 공연 참여 간부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중국 측의 대외연락부 간부는 현송월 단장에 “이런 식의 공연은 곤란하다”라며 “우리는 당 간부 중심이 아닌 인민 중심의 공연을 원한다”라고 수정을 요구했다. 애초 당 대 당의 관점으로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북한으로서는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해당 공연에 참석을 기대했던 중국 상무위원들이 불참 통보를 함에 따라 현송월 단장을 비롯한 모란봉악단, 더 나아가 북한 당국은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중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서야 북한 공연단 측은 중국의 고위급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류윈산을 제외하곤)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황을 짐작했다.
현송월의 공연 취소 및 복귀 결정에는 분명 김정은의 재가가 있었을 것이다. 김정은 스스로 ‘이로써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은 물 건너갔고, 공연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과 자세는 결국 시진핑이 나에게 보낸 거부의 메시지나 다름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 현지에선 상무위원단 중 마지막 장쩌민 파인 류윈산에 대한 시진핑의 의도된 견제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류윈산은 장쩌민 파에 속했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이 부패혐의로 숙청된 상황에서 사실상 마지막 남은 장쩌민 파의 일원이고, 시진핑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당장 류윈산이 날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10월 방북기간 동안 류윈산은 김정일의 시신이 놓인 태양궁을 참배하고 김정은의 현지 찬양에 과도하게 동조했다고 한다. 이에 중국 당국은 류윈산이 북한에서 굴욕적인 외교를 했다는 이유로 중국 복귀 직후 당 학교에서 학습 및 자숙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북한과 당 대 당이 아닌 정상국가 관계를 지향하는 시진핑 주석의 속뜻이었다.
앞서 류윈산은 9월 3일, 중국 열병식 행사를 기획함에 있어 주석단에 옛 지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을 시진핑과 동일한 주석단 의석에 배치한 바 있다. 북한과 중국 내부에선 시진핑과 대부분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이 같은 류윈산의 의전 기획을 두고 굉장한 불쾌함을 드러냈다는 정보가 나돌았다.
또한 지난 11월, 고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의 복권 문제를 상무위원들이 논함에 있어, 공식 입장과는 다르게 류윈산과 나머지 상무위원들 간에 의견 차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후야오방은 1980년대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개혁세력가였고, 그의 죽음은 곧 천안문 사태를 발발시킨 기폭제가 됐다. 이 상황에서 시진핑 파 진영의 상무위원들은 적극적으로 후야오방의 복권을 주장했지만, 뒤에서 류윈산은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류윈산이 기획한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이 치러지려 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중국 대외연락부 측 인사의 공연 내용에 대한 불만제기였지만, 중국 현지에선 집권파 시진핑의 북한 김정은과 류윈산에 대한 견제의 측면으로 해석하고 있는 모양새다.
한편으론 김정은과 북한의 외교적 감각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상무위원단에서 소수파이자 고독한 바위섬과 같은 류윈산만 믿고 모란봉악단을 보낸 김정은과 북한의 외교라인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