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돈으로, 넌 바둑으로 일본을 이기자”
조치훈 9단이 12월 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을 방문했다. 조 9단과 신 총괄회장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진=SDJ코퍼레이션
유망주로 촉망받던 조치훈이 형 조상연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난 것은 6세의 어린 나이이던 1962년의 일이다. 그 무렵 스무 살 즈음이었던 조상연은 바둑 공부를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자신은 대성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동생 치훈을 일본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과 수업료가 고민이었다. 일본으로 건너올 때 받은 후원금이 있었지만 금방 바닥이 났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몰리고 만다.
그때 조상연이 떠올린 사람이 동포 모임에서 잠시 소개받은 신격호 총괄회장이었다. 힘든 조상연은 무작정 신 총괄회장을 찾아갔다. 나중에는 한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재벌이 되었지만 당시 신 총괄회장은 조그마한 껌 공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신 총괄회장은 단 한 번 봤을 뿐인 바둑 형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고 앞으로 매달 2만 엔씩 비서실에서 받아갈 것을 지시했다. 어린 조치훈에게 “나는 돈을 벌어 일본을 이길 테니 너는 바둑으로 일본을 이겨라”라고 말한 것도 이 무렵으로 전해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훗날 조상연이 월간지 <바둑세계>를 만들어 동생의 활약을 국내에 알리고 싶다고 하자 어울리지 않게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3층에 출판사 사무실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런 50년을 이어온 훈훈한 이야기가 최근 일부 언론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는 것은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의 다툼 때문이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은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의 승패를 가를 최대 변수다.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신격호 총괄회장이 동생인 신동빈보다 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맞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측은 신 총괄회장의 ‘건강 이상설’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즉 자신의 후계자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손을 들어준 신 총괄회장의 건강이상설을 일축하기 위해 신동주 전 부회장 측에서 홍보성 이벤트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이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 이상설을 불식시키기 위해 조치훈 9단과의 만남을 추진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 방문 어떻게 이뤄졌나
하지만 조치훈 9단과 함께 신격호 총괄회장을 방문한 조상연 6단의 이야기는 다르다.
조 6단은 “평소 언론 노출이 없던 신격호 회장님이 롯데 경영권 문제 때문인지 최근 국내 TV에 자주 비치지 않았나. 그걸 일본에서 치훈이가 본 모양이다. 얼마 전 전화가 와서 ‘신격호 회장님이 아흔도 넘으셨다니 더 늦기 전에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연락처를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롯데 측에서 방문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 치훈이도 시합이 없는 주라서 날짜가 맞았다. 신 회장님은 아마 4단 정도 기력이다. 예전에는 5점 치수로 지도기도 여러 번 뒀다. 하지만 기력이 예전 같지는 않으셔서 그날은 바둑을 두기보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경황이 없어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마침 집에 치훈이가 직접 쓴 바둑책이 있어서 3권 선물했다. 일부 언론의 추측처럼 롯데그룹에서 불러서 간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일본으로 떠나는 어린 시절의 조치훈. 오른쪽 사진은 1962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난 6세 조치훈이 숙부 조남철의 손에 이끌려 일본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모습. 스승 기타니 9단이 직접 공항에 나와 조치훈 일행을 반겨주고 있다 (왼쪽부터 조치훈, 숙부 조남철, 형 조상연). 사진제공=한국기원
또 조 6단은 “언론의 보도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 당시 우리가 신격호 회장님으로부터 매월 1만 엔을 지원받았다고 했는데 그건 잘못됐다. 2만 엔씩 받았다. 아마 처음 받아 적은 기자가 1만 엔으로 잘못 쓴 것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모양인데 바로잡았으면 좋겠다. 당시의 2만 엔은 꽤 큰돈이었다. 100원, 200원 차이가 아니라 1000만 원, 2000만 원 차이다. 그런 돈을 매달 지원받았는데 받은 쪽에서 오히려 깎아서 말한 셈이 돼버렸으니 큰 실례를 범한 셈이 됐다. 꼭 바로잡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신 총괄회장은 조치훈 9단을 후원한 이후 일본 바둑에도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 9단이 기성전이나 명인전, 본인방전 등 도전기를 벌일 때는 자주 대국장을 찾았다고 한다. 농심신라면배 일본 측 단장으로 부산을 방문한 야마시로 히로시(山城 宏) 9단은 “예전 조치훈 9단과 도전기를 벌일 때 신격호 회장이 예고 없이 대국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대기업 회장이면서도 무릎걸음으로 바둑판 앞에 다가와 예를 표하고 한쪽에서 오랜 시간 바둑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뜬 일이 기억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조치훈과 바둑사랑은 각별했다.
그런 신 총괄회장이었기에 최근 일부 언론의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이 아버지 신 총괄회장의 건강 이상설을 불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신 총괄회장이 일본 바둑계의 거성 조치훈 9단과 바둑 두는 사진을 공개했다”라는 식의 의심어린 보도는 바둑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당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이 아닌가.
한편 조치훈 9단은 지난 7월 한국현대바둑 70주년 기념 조훈현 9단과의 맞대결을 펼친 데 이어 오는 1월에는 ‘전설의 귀환’(가칭)이라는 이벤트로 다시 국내 바둑팬들을 찾을 예정이다.
‘전설의 귀환’은 한국이 배출한 불세출의 기사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조치훈 9단, 유창혁 9단이 참가, 풀리그를 벌이는 대회. 그야말로 한국바둑 레전드들의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