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뙤약볕을 마다 않고 ‘유랑지도자’ 생활을 하는 김성근 전 감독은 누가 뭐래도 천생 야구 인이다. 이종현 기자 | ||
김성근 전 LG 감독(61)의 요즘 ‘직업’은 ‘출장 코치’다. 초등학교서부터 대학, 동호인팀에 이르기까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제주도는 물론 일본, 방콕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비를 들여 다녀온다. 최근엔 연세대 야구부의 SOS 요청에 한여름 땡볕의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김 전 감독을 만난 지난 1일에도 그는 예의 ‘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LG에서 ‘잘린’ 이후에도 매일같이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2백회, 산책 등을 거르지 않는다는 김 전 감독. 선수들과 함께 뛰고 구르기 위해선 체력만큼은 ‘5분 대기조’처럼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한 스포츠 신문의 해설위원을 맡아 관전평을 쓰면서 LG 경기에 대해선 평가를 하지도, 잠실구장 근처엔 가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으리라.
“난 술 잘 안 마셔. 술 마신 다음날 부대끼는 게 싫어서.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안 마신다는 거지. 술을 안하니까 사람들과 멀어지더라고. 그게 좀 그래. 감독 시절에는 코치들과 술자리에 가면 코치들이 무척 어색해 했어. 내가 안 마시니까. 그래서 그 다음부턴 그런 자리는 안 만들지. 원정 경기 다니면서 술 생각이 날 땐 아주 가끔 혼자 나가서 마시곤 했어.”
하지만 젊을 때는 소위 ‘댓병’이라고 하는 소주 1.8ℓ짜리를 들이붓고는 이틀 동안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김 전 감독에게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컵을 손에 쥔 삼성의 김응용 감독이 그를 가리켜 ‘야구의 신’이라고 말한 데 대한 소회를 물었다.
“한국시리즈 10승 감독의 입에서 그런 칭찬을 받았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김 감독이 무지 고민했구나’, ‘압박감이 정말 심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난 그 친구가 갖는 스트레스에선 좀 자유로울 수 있었거든. 글쎄,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어. 난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를 치르면서 ‘이게 감독이구나’하는 엄청난 깨달음이 있었어. 감독이 주관적이 되면 시야가 좁아지거든. 제3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모든 게 다 보이더라고.”
김 전 감독은 마해영이 한국시리즈 6차전서 9회말 9-9 동점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LG 감독을 맡으면서 ‘팀을 바꿔달라’는 구단주의 부탁을 지켰고, 어려운 ‘살림’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란 목표를 달성한 뒤 욕심을 버리고 시작한 한국시리즈였지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자식’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는 모습을 볼 땐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LG 사령탑을 그만두고 물러날 당시를 떠올렸다.
“김성근을 감독으로 앉혀놨을 땐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건 다 알고 맡겼을 거야. 팀을 변신시켜달라는 주문에 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복종해달라’는 옵션은 없었거든. 난 내 길을 만들어가며 선수들을 이끌어가는데 위에선 복종하지 않는다고 ‘딴지’를 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쉬움은 없어. 누굴 원망하지도 않고. 이 사회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타협을 모르고 융통성 없이 외길만 가는 사람은 항상 외롭고 주위에 적이 많은 법이니까.”
김 전 감독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휘어지지 않는 스타일에 조금의 변화만 주었더라도 지금처럼 외로움을 달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부러지는’ 성격을 좋아하고 따르는 ‘알짜배기’ 제자들 때문에 자신의 야구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 자신의 야구인생과 철학을 ‘강의’하는 김 전 감독의 제스 처가 ‘마이웨이’로 성공한 히딩크 감독의 것을 연상시킨다. | ||
“재현이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야. 지금까지 LG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한 선수였다면 아무리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해도 그의 자존심을 지켜줬어야 했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선수를 안아주고 덮어줄 때 결국 선수는 그 보답을 실력으로 풀어내거든. 재현이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팠어. 인간적인 모독을 느끼면서도 야구하겠다고 덤벼드는 거 보면 정말 사내놈의 배짱이 느껴지더라고.”
김 전 감독은 야구 잘하는 선수들 중에 으레 ‘문제아’가 많다고 말한다. 착하고 바른 생활만 하는 선수는 의외로 심지가 곧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동안 ‘재생 기술자’ ‘외인 구단의 오야붕’ 역할을 하면서 숱한 ‘문제아’들과 대면했지만 ‘될성부른 떡잎’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돼있다는 설명이다.
연세대 부근의 한 한정식집에서 맥주 2병을 시켜놓고 식사하는 동안 김 전 감독은 한 잔 이상은 마시질 않았다. 다음날 7시간 동안 또다시 땡볕에서 버텨내려면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야구 외엔 전혀 다른 곳에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 같은 김 전 감독에게도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숨어 있었다. 재일교포학생단으로 모국에 들어와 부산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청년 김성근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는데(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며 웃는다)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라고 한다.
언제쯤 (프로야구로) 돌아올 거냐고 물었다. “오라면 사양은 안하겠지. 야구밖에 재능이 없으니까. 어떤 형태로든 유니폼은 다시 입고 싶어. 그런데 나 때문에 직업을 잃은 친구(LG 전 코치)들이 있어. 그들이 밥 먹고 살 수 있게끔 해줘야 하는데 정말 걱정이야.”
음식점 문을 닫을 때까지 길게 이어진 ‘취중토크’는 일본에선 ‘조센징’으로, 한국에 와선 ‘반쪽발이’로 살아오며 터득한 김성근 전 감독의 ‘생존사’에 흠뻑 취한 시간이었다. ‘하루살이’와 ‘해바라기’ 인생을 거부하는 그의 고집이 왠지 부러웠다. 어느 새 늦은 밤, 그런데 뭘 타고 가실지….
“나? 전철 타고 다녀! 운전면허증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