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말 기분이 묘하네요. 용일이형 은퇴식 동안 내내 눈물을 흘렸거든요. 인사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그런데 두 개의 우승컵을 챙겨 갖고 라커룸을 나오는 순간엔 입이 절로 벌어지더라고요.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가봐요.”
짧은 순간 동안에 일었던 마음의 변화를 놓고 윤용일한테 미안해하는 이형택의 마음 씀씀이가 보기 좋았다. 그는 단식 우승상금 1만8백달러와 복식 상금을 모두 수재의연금으로 내놓으면서도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분’들에게 힘든 결전 끝에 얻은 상금이라면 약간의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며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전했다. 모자를 벗어볼 수 없냐고 부탁했다. 항상 모자 쓴 모습만 봐서 온전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하자 수줍은 웃음을 띠며 “머리가 눌린 상태라 스타일이 안 나온다”며 극구 사양한다. 코트장에서 우승 후 모자를 벗고 관중들에게 인사를 할 때 언뜻 봤던 ‘부분 염색’ 머리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한정된 인터뷰 시간으로 조를 여유가 없었다.
격전을 치른 뒤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의 맛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될까. 이형택은 무척 ‘맛나게’ 맥주를 들이키면서 2000년 US오픈 대회에서 16강에 진출한 후 2001년 2월부터 본격적인 투어 생활을 시작했던 지난 2년 7개월간의 시간을 돌이켜봤다.
▲ 이영미 기자와 캔맥주를 맛나게 들이키는 이형택 선수. 지난 20일 끝난 2003 삼성증권배 챌린저 대회 단복식을 휩쓴 이형택은 상금 전액을 수재민들을 위해 쾌척하기도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현재(9월22일) 세계 랭킹 65위인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상위 랭킹 진입을 목표로 두기보다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더 정확하다는 이형택은 이런 표현으로 설명을 했다.
“예전엔 랭킹 톱10에 든 선수들을 상대할 경우 미리 겁먹고 어렵게 경기를 풀어간 적이 많았어요. 요즘엔 경험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간이 부어서인지 랭킹 1, 2위와 상대해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요. 올 초 아디다스인터내셔널대회 결승에서 맞붙었던 카를로스 페레로라는 스페인 선수 기억나세요? 글쎄 이번 랭킹 발표를 보니까 앤디 로딕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더라고요. 랭킹만 따지면 어떻게 ‘감히’ 그 선수를 이길 수 있었겠어요?”
세계 랭킹 1백위 안에선 1등이나 99등이나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안 난다고 한다. 이형택이 당시 세계랭킹 4위였던 카를로스 페레로를 상대로 멋진 승부를 연출한 덕분에 투어 생활 최초로 ATP(Assocaition of Tennis Professionals)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지난 1월의 ‘한판승’도 이런 논리를 증명해 보인 대회였다. 삼성증권배 챌린저대회에서 짝을 이룬 복식 파트너 알렉스 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다가 대회 때마다 바뀌는 복식 파트너는 어떻게 구하는지 궁금해졌다.
“큰 기준은 없어요. 대회 전에 호흡과 실력이 맞을 것 같은 선수를 골라내는 거죠. 솔직히 복식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단식을 뛰는 선수들은 게임 감각을 유지하거나 연습 파트너 삼아 복식에 출전하기도 하거든요. 톱 랭킹에 있는 선수들은 복식에 나가지 않아요. 저처럼 랭킹이 어정쩡한 선수들이 복식에 적극적이죠. 그런데 이 캔 맥주 진짜 맛있네.”
이형택은 코트에서도 그렇지만 코트 밖에서도 참 근사한 남자였다. 특히 운동선수 생활을 어렵게 지속해 왔던 탓인지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그의 멘트들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면서도 푸근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20대 초반만 해도 술 마시면서 자주 울었어요. 이상하게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도 좀 취한다 싶으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유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본 기억이 많지가 않거든요. 아마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서, 아버지가 생각나서 울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 증상이 조금 덜해진 것 같은데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엔 눈물이 나요.”
“음∼. 전 술만 마시면 힘이 세져요(?).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면 잠을 자거나 쓰러지는데 전 힘이 솟구쳐서 무조건 달려야 해요. 한번은 동석자 중 한 명이 술 먹다 뛰는 절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포기한 적도 있었어요. 저도 왜 달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달리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져요.”
외국에서 투어 생활을 하기 전에는 은퇴한 윤용일과 이형택, 그리고 또 다른 멤버가 ‘참나무회’ 발기인으로서 일주일에 4차례씩 주례(酒例)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모임의 취지는 열심히 운동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 것. 그런데 술자리에선 ‘가슴 모아, 뜻 모아’가 일사분란하게 이뤄지다가도 다음날 말짱한 정신이 돼서는 ‘나 몰라라’로 변질되고 말아 주례 모임의 성과가 영 신통치 않았단다.
“예전엔 술 마신 다음날 운동으로 땀 빼며 숙취를 풀었는데 요즘엔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나이 탓이겠죠, 뭐. 그리고 멤버들 저마다 결혼 등으로 바쁘게 살다보니 뭉치기도 어렵고요. 그런데 이 얘기를 감독님(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이 아시면 난리가 날 텐데….”
현재 결혼할 상대가 없다는 이형택은 너무 잘생긴 여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뒤떨어지는 외모의 여자는 태어날 2세를 위해서 정중히 사양하고 싶단다. 요조숙녀보단 자신의 일이 있는 커리어우먼을, 운동선수보다는 운동하지 않는 평범한 여자를 원한다고 한다.
이형택은 그간 수많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들과 상대해왔다. 나름대로 그와 ‘인연’이 있는 앤디 로딕(세계랭킹 2위·이형택의 상대 전적 6전1승5패)과 앤드리 애거시(세계랭킹 4위·3전 전패)에 대한 짧은 평을 요구했다.
“앤디 로딕은 강한 서브로 그랜드슬램까지 우승했으면서도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수이고, 애거시는 가질 것 다 가졌으면서도 은퇴하지 않는 욕심 많은 스타플레이어에요. 애거시와 싸워서 제발 한번만 이겨봤으면 소원 풀리겠어요. 그런데 맥주 한 잔 더해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