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왕년의 홈런왕인 김성래 SK 코치(왼쪽)와 김성한 기아 감독. | ||
원년 홈런왕인 김봉연(극동대 교수·전 해태), 3년 연속 지존의 자리를 지킨 이만수(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코치·전 삼성), 30홈런의 벽을 처음으로 허문 김성한(기아 감독·전 해태), 그리고 87년과 93년 홈런왕에 오른 김성래(SK 코치·전 삼성) 등 역대 홈런왕들로부터 홈런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대담 형식으로 꾸며봤다.
사회:홈런타자는 언제 승부를 뒤집을지 모르는 ‘한방’과 그 희소성 때문에 언제나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홈런 잘 치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
김성한(한):서서히 눈을 뜨게 되더라. 낚시에 비유하자면 홈런 칠 때 그 특유의 ‘손맛’이 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나. 홈런을 치게 되면 그 순간의 손맛을 기억하게 된다.
|
||
| ▲ 이만수 | ||
이만수(수):무슨 비결이 있겠는가. 요즘 승엽이를 보면 배팅 순간 나오는 각도가 짧고 맞는 순간 팔로 스윙이 길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장타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뛰던)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많이 부족했던 것 같지만 앞으로 끌어주는 힘이 좋았던 것 같다.
김봉연(봉):홈런 치는 타자들은 안정감이 있다. 스윙할 때 중심을 뒷다리에 끝까지 60∼70%를 남겨둔다. 몸의 균형과 파워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선수 시절 홈런 칠 때 사진을 보면 마치 몸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당시에는 기록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하는 투수들의 견제가 더 심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나.
수:두 번째 타석까지 안타나 홈런을 2개씩 쳤다고 하자. 세 번째 타석에서는 어김없이 몸에 맞는 볼이 나오곤 했다. 당시에는 말이 프로였지 수준은 아마 야구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거기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선수 시절 몸에 맞는 볼로 세 번이나 팔에 깁스를 했다고 하면 말 다한 게 아니겠는가(웃음). 고의적으로 맞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견제 차원에서 (볼을) 몸쪽으로 상당히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
||
| ▲ 김봉연 | ||
수:지금은 한 분야만 잘해도 눈에 띄지만 80년대만 해도 다방면으로 잘 해야 지도자나 팬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마도 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당시에 번트 지시를 어기거나 한다면 이후 출전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분위기가 그랬다. 번트 기회가 다른 선수보다 적었지만 홈런타자라고 특별히 대우받는 것도 없었다.
사회:80년대 초반 프로야구는 김봉연 교수와 이만수 코치의 대결이 정말 볼만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기억 같은 게 있나.
봉:당시에 1백호 홈런을 누가 먼저 치느냐 하는 게 대단한 이슈였다. 잠실에서 MBC 청룡과의 시합이었는데 승리를 위해서 번트 지시를 받고 자세를 취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1백호 홈런에 나는 -3, 이 코치는 -2였다. 관중들이 난리가 나서 강공으로 나갔다가 결국 이 코치에게 타이틀을 뺏겼다. 승용차가 부상이었는데 말이다(웃음).
사회:80년대는 게임 수가 적은 이유도 있겠지만 90년대 중반까지 30개 이상을 친 홈런왕을 보기 힘들었다. 80년대에도 88년 김성한 감독의 30호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지금과 이렇게 홈런 개수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뭔가.
수:당시만 해도 타격 기술이 떨어졌다. 힘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쳐야 홈런이 나올 수 있다는 최소한의 이론도 모르고 야구를 할 때였다.
래:선수들의 힘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당시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때다. 90년대 들어오면서 파워를 보강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웨이트’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
김남용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