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한 단골정신으로 말 많은 프로세계에서 9년간 한 자리를 지켰던 김호 감독. 그런 만큼 정들었던 수원 삼성 사령탑을 떠나는 모습이 그리 홀가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영원한’ 그리고 ‘고독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라운드의 승부사로 살았던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흑백과 컬러 필름으로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95년 수원 ‘삼성호’의 선장을 맡아 단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항해를 맡기지 않았던 김호 감독(59)이 16일 대구FC와의 홈경기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창단팀 감독으로 삼성과 인연을 맺으면서 10년 프로젝트를 세워놓고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그가 프로젝트 달성 1년을 남겨놓고 물러나는 과정에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마지막 경기를 앞둔 지난 13일 10년 단골집이라는 서울 압구정동의 한 일식집에서 기자와 만난 김 감독은 ‘삼성호’의 키를 다른 선장에게 넘겨주는 심정과 파도처럼 살아왔다는 지도자로서의 삶, 그리고 축구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승부사 김 감독’이 아닌 ‘김호’라는 자연인으로 비춰지길 원했던 그와의 ‘취중토크’를 소개한다.
김호 감독은 유난히 단골집이 많다. 축구감독으로서 가는 곳, 아내와 가는 곳,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 만나는 곳 등을 각기 따로 정해 놓고 만남의 성격에 따라 장소를 정한다. 기자와 만난 일식집도 서울에서 축구 관계자를 만나거나 기자들과의 약속이 있을 때 항시 애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김 감독한테는 전속 이발사가 있다. 19세 때 첫 인연을 맺은 이발소 아저씨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됐지만 이발사가 자리를 옮겨 다닐 때마다 그 이발사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머리를 맡겼단다.
이렇듯 김 감독이 ‘단골 정신’을 실천하는 이유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어떠한 것에도 쉽게 변해서도, 달라져서도 안된다는 신념이 유난히 강하다.
프로팀 감독이 한 팀에서 9년을 보냈다는 사실은 요즘처럼 감독 자리가 파리 목숨에 비유되는 현실에서 ‘천연기념물’에 해당되는 일이다. 김 감독의 목표대로 10년을 채우고 자연스럽게 물러났더라면 여러 가지로 모양새가 그럴듯하게 갖춰졌겠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을 실천해 줄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다른 건 괜찮아. 그러나 클럽하우스를 짓고 전용훈련장을 완성하거나 어린이축구를 육성시키는 부분 등이 계획대로 되질 않았어. 가장 마음 아픈 건 김호를 보고 삼성에 들어온 어린 선수들을 놓고 가는 거지. 걔네들한테 난 아버지였거든.”
김 감독은 지난해 월드컵 열기로 인해 나라 전체가 축구 열풍으로 들썩거릴 때 자신은 월드컵 4강 진출에 대한 기쁨보다 월드컵 이후의 프로축구가 더욱더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국민들이 월드컵을 통해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게임은 다 봤는데 프로축구도 어느 정도 흉내는 내야 하는 거잖아. 팬들의 눈높이가 장난 아닌데도 태연하게 있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돼서 속 좀 끓였지.”
만남의 성격이 그래서인지 유난히 ‘떠난다’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재계약 시점을 남겨 놓고 내심 ‘생명 연장’을 기대했다가 시즌도 마치기 전에 터져 나온 차범근 감독과의 계약 문제는 분명 꼬장꼬장한 김 감독의 심기를 ‘조금 많이’ 불편하게 만들었을 터.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람 사는 데는 절차가 있는 거야. 그리고 저 곳이 갈 곳인지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하는 거고. 그런데 요즘엔 그런 게 없어진 것 같아. 가타부타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 가치가 이것밖에 안된 건데.”
그는 사람은 비굴해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설령 내일 깡통을 차는 일이 있어도 비굴해지고 싶지 않아서 ‘내려오는’ 거라고 토를 달았다. 덧붙여서 축구계의 주류로 불리는 연·고대 출신도 아니고 대학 졸업장도 없는 고졸 신분으로 큰소리치며 할 말 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콩고물’에 눈멀지 않고 한길만 보고 살아온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