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8일 현지시간) 제 일기를 담당하는 기자 누나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선 어렵게 말문을 여시네요. “지성씨, 괜찮아?” 암스텔담에서 치러진 아약스와의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한 뒤였고 전 세 경기 연속 벤치만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상황이라 상대방 입장에선 전화하기조차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정말 괜찮습니다. 물론 90분 내내 감독의 ‘콜’ 사인만을 기다린 채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상이라도 당한 상황이라면 애써 위로해보겠지만 몸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뛰지 못하니 그 좌절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일주일 전인가요. 에인트호벤 2군 선수들과 훈련할 기회가 있었어요. 1군과 2군이란 어쩌지 못하는 타이틀로 인해 훈련 첫날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연습경기를 하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신바람 난 축구를 하며 참으로 오랜만에 ‘오랫동안’ 그라운드를 뛰어다녔습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을 비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전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슬럼프’란 단어조차 모르고 살 만큼 상승가도를 달렸습니다. 축구를 잘한다는 자만심에도 사로잡혔고 팬들의 찬사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겉멋이 들기도 했죠. 월드컵 때의 기세를 몰아 네덜란드 리그에서도 저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착각’했습니다.
요즘엔 ‘기다림’ ‘인내’라는 단어가 참 가슴에 와 닿아요. 누구한테나 찾아오는 슬럼프를 얼마나 잘, 슬기롭게, 또 끈질기게 버티며 극복해 가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잘 이겨내면 두 번째, 세 번째 슬럼프가 와도 크게 헤매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기고요.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한국에선 J리그 복귀설도 나돌더군요. 이전 소속팀인 교토는 물론 다른 팀에서 제의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깨지고 부서질지언정 네덜란드에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생각이에요.
지금의 팀 사정상 제가 하루아침에 주전으로 발탁되거나 코칭스태프나 홈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엔 다소 어려울 수도 있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하면서 실력이나 자신감 등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네덜란드에서 반드시 인정받는 선수가 될 겁니다.
제가 겪고 있는 과정들이 당시엔 두 손 들어 항복하고 싶을 만큼 어려운 것이라 해도 밖에서 보는 것처럼 크게 슬프지도, 힘들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직 전 어리고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찾아올 거라 확신하거든요. 지성이가 철 좀 들었죠?
2월8일 에인트호벤에서
온라인 기사 ( 2024.12.08 1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