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금융 ‘열쇠’ 놓고 거물들 각축전
홍기택 한국산업은행 회장, 올 4월 홍기택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산업은행의 차기 회장 자리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하다. 일요신문 DB
산업은행을 이끌고 있는 홍기택 회장의 임기는 오는 4월까지다. 임기 만료까지는 아직 3개월여가 남았지만 벌써 다음 자리를 노리는 ‘잠룡’들의 물밑경쟁에 불이 붙었다. 홍 회장의 연임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제계를 강타한 조선업 부실 등 국책은행의 방만 경영이 드러나면서 홍 회장은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특히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2000년 이후 한 번도 유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교체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금융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후임자에 쏠리고 있다.
올 초만 해도 산업은행 차기 행장의 윤곽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정책금융의 총책임자라는 자리여서인지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와 정찬우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서태종 금감원 수석부원장,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 등 경제계에서는 ‘대감님’으로 불리는 인물들이 줄줄이 하마평에 올랐다. 증권가에서는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의 이름도 뒤늦게 후보자 명단에 등장했다.
백가쟁명 같던 판세는 1월 말이 되면서 2파전 혹은 3파전으로 압축됐다. 우선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의 경우 당초 강력한 후보로 꼽히지 않았음에도 ‘차기 회장으로 유력하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눈길을 끌었다. 이 행장은 민·관을 두루 거친 금융 전문가이자 박근혜 정부 들어 금융권 실세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이 행장은 이번 정부 들어 금융권 요직을 대거 차지한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회)’의 좌장 격인 데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인재풀이라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금융권의 대표적인 ‘친박’으로 꼽힌다. 서강대 수학과를 나온 이 행장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지한 것은 물론, 수출입은행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나는 친박이 맞다. 박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다. 이 행장의 최대 강점은 여러모로 박 대통령과 ‘코드’가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행장은 외환위기 시절 KDI에 있으면서 기업 구조조정 등 금융개혁에 참여했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과 대한투자신탁 사장, 한빛은행장, 우리은행장 등을 거쳤다. 거시경제 전문가에다 민간 금융회사까지 거친 인물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의 강점은 오히려 약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금회 멤버라는 점은 양날의 검이 되고 있다. 현 홍기택 회장 역시 서금회와 관련해 취임 당시 홍역을 치른 데다 이덕훈 행장 역시 수출입은행장에 발탁될 당시 적잖은 논란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행장이 산업은행장으로 선임될 경우 서금회를 둘러싼 잡음이 재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같은 정책금융기관인 수출입은행장이 산업은행장을 맡은 전례가 없다는 점도 부담이다.
이 행장이 맡고 있는 수출입은행은 산업은행과 마찬가지로 조선업 등의 부실경영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 명분도 약하다는 평가다. 수출입은행은 지난해 성동조선해양 등을 상대로 한 대출 부실화로 재무건전성이 악화돼 경영위기를 겪었다. 지난해 9월에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9.44%까지 떨어져 정부로부터 1조 원에 달하는 현물출자를 받기도 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이 행장은 정책금융기관 수장으로서 경영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수출입은행보다 덩치가 훨씬 큰 산업은행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고 전했다.
이덕훈 행장의 대항마로 거론되는 인물은 정찬우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사실 그는 지난 1월 초 퇴임할 때부터 ‘산업은행장 내정설’이 나오기도 했다. 당초 3월까지였던 임기를 두 달여 앞두고 미리 짐을 싸자 거취를 두고 추측이 난무했고, “산업은행장으로 옮긴다”는 관측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당시 정부당국에서는 “정 부위원장이 차기 산업은행 회장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발언까지 나오기도 했다.
왼쪽부터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정찬우 전 금융위 부위원장, 안종범 경제수석
경력이 말해주듯 ‘경제통’인 정 전 부위원장은 관료사회와 국제금융, 국책은행 등 정책 금융에 해박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등과 함께 당시 박근혜 당시 후보의 ‘금융 교사’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참모들과도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는 등 이덕훈 행장 못지않은 실세로 통한다.
다만 그가 금융위 부위원장 시절 인사 개입 의혹 등으로 잡음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는 KB금융 내분 사태 때 같은 금융연구원 출신인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 선임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이에 대해 당시 정 전 부위원장은 “개입했다면 손에 장을 지진다”며 강력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정 전 부위원장이 KB금융 외에 다른 금융계 인사에 관여했다는 소문은 계속 흘러나왔고, ‘금융권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 전 부위원장의 거취와 관련해 주목할 부분은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도 거론된다는 점이다. 이는 안종범 현 수석이 산업은행 회장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것과 연결된다. 정 전 부위원장은 박 대통령의 금융 교사 3인방 가운데 유일하게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안종범 경제수석과 최경환 전 부총리가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해 정 전 부위원장이 맡은 금융부위원장은 차관급 정도다. 이에 따라 그가 경제수석으로 옮기고, 안 수석이 산업은행장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정 전 부위원장은 1963년생으로 1955년생인 최경환 전 부총리나 1959년생인 안종범 수석에 비해 젊다는 점에서 같은 장관급이 아닌 차관급 자리에 갔을 수 있다”면서 “3년간 금융위에서 2인자 역할을 한 만큼 이제는 수장급에 오를 때도 됐다”고 내다봤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