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른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한의사 측이 ‘현대 의료기기’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하자 의사들이 전면 반대하고 나서며 양측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의료기기 사용 허가’ 투쟁 방안의 일환으로 김필건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 1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골밀도 측정기를 시연했다. 사진출처=대한한의사협회
지난 12일, 김필건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 회장이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배포한 기자회견문 마지막 장에 있던 문구다.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선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 회장이 직접 ‘초음파 골밀도 측정기’ 앞에 앉아 29세 남성의 발목을 검사했다. 일반 의사가 진료하듯 남성의 인적 사항을 묻고, 젤을 발라 골밀도를 측정한 뒤 모니터에 뜨는 수치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김 회장은 앞서의 문구와 같이 “직접 골밀도기를 이 자리에서 시연했으니, 복지부는 나부터 잡아가라”고 말했다.
김 회장이 스스로 ‘잡아 가라’고 말한 이유는 한의사의 골밀도 측정기 사용이 위법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한의사가 초음파, X선, 심전도 측정기와 같은 의료기기를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 2011년 대법원이 측정기를 사용한 한의사에 대해 벌금 50만 원을 선고하기도 했다. 의사 단체인 의료혁신투쟁위원회는 이날 “의료법 27조 1항인 무면허 의료 행위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김 회장을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그럼에도 김 회장이 ‘범법 행위’를 ‘공개적’으로 한 이유는 양방·한방 의사들 간 해묵은 갈등인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여부 때문이다. 실제로 김 회장도 이날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막고 있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의료기기 투쟁 방안’의 일환”이라며 “향후 엑스레이와 초음파 기기도 쓰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의 ‘폭탄선언’이 전해지고 난 뒤, 두 의료단체 사이엔 강도 높은 비난이 오갔다. 의료혁신투쟁위원회는 성명서와 일간지 광고 등을 통해 “국민이 실험쥐인가. 한방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은 환자와 국민을 생체실험장으로 내모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한의사 단체인 참의료실천연합회는 “오진과 과잉검사와 같은 양의사 진단권 독점으로 인한 심각한 폐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맞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KBS와 네이트가 각각 진행한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논란’ 관련 여론조사는 둘 다 비정상적인 투표 양상을 띠며 결과를 내지 못한 채 조기 마감됐다. 이를 두고 양측은 서로를 향해 “조작했다”는 비난을 이어갔다.
이 같은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논란의 시작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95년 의협이 “일부 한의원에서 엑스레이, CT(컴퓨터 단층촬영)까지 들여놓고 부당 진료를 하고 있다”며 정부에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단속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 이 때부터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지난 2011년, 운석용 전 국회의원이 ‘한의약 육성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해당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의학 정의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을 기초로 한 의료행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을 기초로 하거나 이를 현대적으로 응용·개발한 의료행위’로 수정하자고 제안한 것. 한의사들은 이를 반겼고, 의사들은 ‘절대 수용 불가’를 외치면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12월 28일, 국무조정실에서 규제기요틴(규제개혁) 과제 114건을 발표하면서 양방·한방 의료계의 전면전이 시작됐다. 정부가 내놓은 규제완화 정책 중에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과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 여기에 한 달 뒤인 지난 2015년 1월 보건복지부는 “상반기 중 한의사에게 허용할 수 있는 현대 의료기기 범위를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의사 측은 ‘의사면허증 반납’과 ‘외과 수술 거부’를 거론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했다. 한의사 측은 한방을 비판하는 의사들에 대한 고소·고발, 대국민 서명운동으로 맞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추무진 의협 회장과 김필건 한의협 회장은 번갈아 가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결국 해당 논쟁이 국회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규제기요틴 사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부도 상반기 내 한의사용 현대의료기기 분류를 마무리 짓겠다는 계획을 미뤘다.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논란이 해를 넘기고 연초부터 다시 불이 붙게 된 이유다.
대한한의사협회는 SNS 메시지를 통해 대한의사협회가 여론조사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출처=대한한의사협회
한의사 측은 “손과 발목을 삐어 한의원을 찾는 환자가 연간 425만 건”이라며 “현재는 한의사가 X레이 등 현대 의료장비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 환자는 양방 의료기관에서 따로 엑스레이를 찍어 와야 한다. 이런 과정 때문에 환자들의 불편은 물론 진료비도 이중 부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의대도 교육 과정에서 의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의료기기 사용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김지호 한의협 홍보이사는 “한의대와 의대의 교육 커리큘럼이 70% 동일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래도 의료기기 교육이 부족하다면 관련 프로그램을 개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의사들은 한의사는 의료기기를 사용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입장이다. 일부 의사 단체들은 “아무리 자동차에 대해 공부를 했어도 운전면허 없이 운전하면 범죄이듯, 한의사가 아무리 의학 공부를 했어도 현대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 의료기기를 쓰는 것은 사실상 범법행위”라고 주장했다.
강청희 의협 상근 부회장은 “의협은 정확히 한의협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한의학계가 주장하는 엑스레이나 초음파 등은 의사 내에서도 전공의가 아니면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려운 세분화된 분야다. 영상의학에 대한 충분한 이론 교육과 실습 과정이 없다면 일반 의사마저도 오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의과대학 교육 과정의 70%가량이 의과대학 교육과 동일하다는 것도 검증되지도 않았다”며 “교육 과정이 있더라도 이론 교육만 받고 어떤 의료기기든 쓸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처방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검사 결과를 잘못 판독하면 잘못된 치료법을 선택하고 결국 환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두 의료단체 모두 “국민건강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따갑다. 의료인들이 환자의 안전은 뒷전인 채 ‘밥그릇 챙기기’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의료인의 면허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자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며 “한·양방 간 반대 의견을 제외하면 어떠한 발전적인 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의료가 누구를 위한 학문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과열 양상을 띠고 있는 두 의료단체는 향후 강력한 대응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한의협 측은 복지부를 상대로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 등 가능한 모든 행정소송과 헌법소원 청구를 검토 중이다. 의협 측은 전국의사대표자 궐기대회를 비롯해 세계의사협회 차원에서 한의사 의료기기 반대 기자회견을 연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두 의료단체 모두 “정부가 논쟁을 과열시켰다. 혼란을 막으려면 개입해서 명확하게 선 긋기를 해야한다. 수수방관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두 의료단체와 함께 공청회를 여는 등 수차례 논의를 했지만 양측 의견이 첨예하게 갈려 의미 있는 협의가 어려웠다”며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내부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