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나. 힘이 있는 자가 ‘나’를 그의 생각의 감옥에 가둬놓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고 지적질하고 재단하려 한다면 그 공포를 어찌할까. 남자가 되기 위해 테세우스는 공포의 아이콘 프로크루스테스를 극복해야 한다. 테세우스는 영웅답게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프로크루스테스를 사로잡아 프로크루스테스가 많은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침대에 맞춰 그의 손과 발을 싹둑, 잘라 버린다.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하는 법! 프로크루스테스는 그가 남을 재단하고 몰아붙이고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했던 바로 그 침대 위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처음에는 그저 숨이 막혔던 그 침대를 다시 생각하는데 왜 이번에는 소름이 돋을까? 그 소름은 단순히 프로크루스테스에 대한 혐오감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프로크루스테스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에서 온다. 큰 권력이 없어서, 거느린 사람이 없어서 프로크루스테스를 나와는 상관없는 인물, 그저 내가 혐오하고 싫어하는 독재자쯤으로 여기고 손가락질 했으나 어쩌면 그것이 함정일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내 생각대로 살아주지 않는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자식에 대해, 부모에 대해 얼마나 자주 실망하고 미워하고 한탄했는가.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감옥에 가두고, 남편을 ‘남편’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아내를 ‘아내’라는 감옥에 가두고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이 문제라 생각했지, 그들에 대한 내 기대가 문제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지 않나.
기대대로 자라주지 않는 자식을 야단치고 질책하면서 가장 가까운 그들의 손발을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대대로 행동해주지 않는 배우자를 서운해 하며 비난하면서 내 침대에 내가 묶여 스스로의 숨통을 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올해의 계획이 생긴다. 올해 나의 계획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 같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