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린 오티 로이터/뉴시스 | ||
육상은 유독 귀화선수가 많다. 모두 9명.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비운의 흑진주’ 멀린 오티. 운동선수로는 환갑 진갑을 다 넘긴 나이인 44세의 오티는 자메이카 국적을 버리고 슬로베니아 국적을 취득했다. 오티는 지난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시작으로 이번 아테네가 무려 7번째 올림픽 출전이다. 늘 정상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유독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어 그동안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에 그치고 있다. 자메이카에서 ‘퇴물’ 취급을 받자 지난 2002년 국적을 바꿨다. 국제육상연맹(IAAF) 규정상 귀화 후 3년간 출전이 불가능하지만 “원 조국이 허락하면 3년 미만이라도 출전가능하다”는 특별조항덕분에 아테네행이 성사됐다. 올림픽을 앞두고 지난 5일 100m에서 11초09로 슬로베니아 신기록을 세웠는데 자메이카측은 “그 정도 선수는 우리에겐 중위권”이라며 콧방귀를 뀌었다는 후문.
오티만큼 자주 언급되는 선수가 쿠바 출신 육상 3단뛰기 선수인 야밀 알다마(31)다. 알다마는 지난 99년 세계선수권대회 2위에 이어 시드니올림픽에서는 4위에 입상한 톱 클래스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다. 지난 2001년 영국인 방송기술자를 만나 결혼한 뒤 런던에 거주해왔다. 이후 꾸준히 호성적을 내며 영국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정작 이번 올림픽에는 엉뚱하게 아프리카 수단 국적으로 출전한다. 영국 국적법상 오는 2005년이 돼야 귀화가 가능했던 것.
알다마에게 특별규정을 적용하라는 여론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예외 없음’을 고수했다. 결국 알다마는 원래 조국인 쿠바에서조차 대표복귀를 거부당하자 제3의 조국을 찾게 됐고, 자신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온 이탈리아와 체코, 수단 중에서 여권발급이 가장 빠른 수단을 택했다. 더 재미난 것은 알다마의 남편이 현재 마약밀매 혐의로 복역중이라 올림픽이 끝나면 어차피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 그야말로 ‘올림픽용 단기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알다마처럼 국제결혼 덕분에 본의 아니게 국적을 바꾼 선수들은 또 있다. 여자 다이빙 선수인 이리나 라시코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과 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 독립국가연합(CIS)과 러시아로 출전했으나 이번 올림픽에는 남편의 국적을 따라 호주 유니폼을 입는다.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대표로 애틀랜타에서 은메달을 땄던 미아 아우디나도 남편을 따라 네덜란드 선수가 됐다.
가장 비난을 많이 사고 있는 선수들은 아무래도 ‘명백히 돈 때문에’ 조국을 등진 선수들. 주로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중동권 부국으로 옷을 갈아입은 선수들이 많다. 이중 육상 남자 1500m의 라시드 람지가 대표적으로 ‘괘씸죄’에 걸린 상태. 아예 ‘월봉 7백50달러’라는 ‘귀화 약정금’을 챙기고 바레인으로 귀화한 람지는 어제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모로코의 히참 엘게루즈에게 지난 7월 패배의 쓴잔을 안겼다. 모로코 언론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람지가 히참을 꺾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는 중.
케냐의 육상스타 앨버트 체프쿠루이는 카타르로 귀화하면서 아예 ‘아마드 핫산 압둘라’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옛 소련이 해체된 이후 사회주의권 선수들의 ‘서방행’도 활발하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그리스의 역사(力士)’이자 국민영웅인 남자역도의 피로스 디마스(85kg급). 원래 조국은 알바니아지만 할아버지의 나라인 그리스로 귀화해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독립국가연합(CIS) 출신인 카키아스빌리스(94kg급)도 그리스로 귀화한 뒤 같은 역도 종목에서 올림픽 3연패에 성공, 피로스와 함께 올림픽 4연패에 도전중이다. 그러나 과거만큼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 두 선수 모두 이번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게 중평.
바르셀로나에서 은메달을 땄던 중국 여자탁구 선수 가오 준은 지난 94년 중국계 미국 엔지니어와 결혼했고 97년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오 준은 국적을 바꾼 지 이미 7년이 지났지만 국적을 놓고 알쏭달쏭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95년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대표팀 제의를 받자 ‘둘 다 나의 조국’이라며 택일을 거부했는가 하면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미국 국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해 2회전에서 탈락했다. 이후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며 중국대표팀 선수들과 열심히 훈련을 해오더니 올 초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대표로 선발됐다. 이 과정에서 지난 2002년 남편과 이혼까지 한 터라 향후 미국에 머물지 원래 조국인 중국으로 돌아갈지 미지수.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귀화선수들에 대해 세계 스포츠계에서는 아직까지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육상 400m와 800m를 제패했던 쿠바의 육상영웅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선수들이 돈을 위해 국적을 바꾸는 행위는 곧 ‘스포츠 매춘’이다”고 맹비난했다. 알베르토의 비난처럼 스포츠맨들의 국적변경이 스포츠 매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부 선수들에게 ‘금메달은 피보다 진한’ 것이 현실인 듯하다.
이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