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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진의 아버지 조희경씨와 어머니 우학자씨(가운데). 21일 파라과이와의 8강전에서 골이 터지자 기뻐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경기 후 그라운드에 쓰러진 선수들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눈물짓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선수의 가족들. 올림픽 기간 동안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리스로 보냈던 그들은 56년 만에 올림픽 8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한 사실에 흐뭇해하면서도 파라과이전에서 1점 차로 4강 문턱을 넘지 못하자 진한 탄식과 함께 아쉬움을 전했다. 어느 누구보다 지난 일요일 새벽을 길게 보냈을 축구대표팀 선수 가족들의 남다른 사연을 모아본다.
22일 새벽 12시. 경기도 파주 법원리 조재진(23·시미즈 펄스)의 집은 대낮보다 더 밝고 시끌벅적했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중계차까지 동원해서 조재진의 가족들을 인터뷰하며 파라과이 직전 그들의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마치 야외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자 조재진의 집에는 가까운 친척과 친지들, 그리고 이웃 주민들까지 속속들이 모여 들었고 가족들은 대표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응원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조재진의 외삼촌은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 등을 외치며 연습을 독려했고 조재진의 어머니 우학자씨는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님들에게 과일과 음식 등을 나르며 극도의 긴장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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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살로니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
하지만 후반전에서까지 한국이 0-3으로 파라과이에 밀리면서 패색의 기운이 완연해지자 ‘대~한민국’을 외치던 응원 소리가 점점 가라앉더니 맥을 못 추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이천수의 발 끝에서 천금 같은 첫골이 터져 나왔고 그 장면을 지켜본 조재진 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쁨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상대의 핸들링 반칙으로 페널티킥이 주어지자 가족들은 마치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부둥켜안고 껑충껑충 뛰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말리전의 행운’은 단 한 번뿐이었다. 파라과이전에선 2-3 이후의 기적은 또다시 연출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잠시 고개를 숙이며 할 말 없어 하던 조재진의 부모는 오히려 취재진들을 위로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경기 내내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며 속을 태운 조재진의 큰누나 조혜련씨(증권 업무)와 조혜정씨(의상 디자이너)의 하얘진 얼굴 표정에선 가족들만이 공유하는 참담함이 전해져 말을 붙이기조차 미안할 정도였다.
조재진이 골을 성공시켰거나 한국팀이 승리했다면 취재 과정에서 나온 조재진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과 수원 삼성 입단 후 무릎 수술로 1년간 방황을 했던 시간들, 그리고 조재진이 대시했던 여자 연예인과 작은 누나와 압구정동에 쇼핑 나갔다가 여자친구로 오해받고 팬들로부터 엄청난 폭언과 비방에 시달린 내용 등을 재미있게 담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 많은 ‘사연’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며 여명이 밝아오는 파주 조재진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재진의 가족 외에도 파라과이전 이후 ‘잠 못 드는 새벽’을 맞이한 태극전사의 가족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골키퍼 김영광(21·전남)의 아버지 김홍현씨는 지난 번 말리전에서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경험담을 털어 놓으며 이번 파라과이전에서도 한편의 드라마를 기대했었는데 ‘작품’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파라과이전을 앞두고 아들 김영광과의 통화에서 “영광이 입에서 처음으로 결승까지 갈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찬 얘기를 들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지만 꼭 멋진 모습으로 귀국하겠다고 말해 애비를 감동시키기까지 했는데 너무 아쉽다”면서 “그래도 영광이가 이번 올림픽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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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김영광, 2.김동진, 3.김정우, 4. 김호곤 | ||
아테네올림픽 A조 2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20m짜리 시원한 중거리포를 작렬한 김정우(22·울산)의 어머니 정귀인씨는 “얼마전 정우가 전화를 걸어선 올림픽 오니까 사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말하더라.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사고 싶은 걸 꼭 사줘야 한다고 하길래 조건을 내걸었다. 결승까지 올라 가장 늦게 돌아오면 사주겠다고. 비록 그 조건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몸을 아끼지 않고 뛴 내 아들이 원하는 건 모두 사주고 싶다”며 대견스러워했다.
김호곤 감독의 아내 최문실씨는 올림픽 기간 동안 ‘심하게’ 응원을 하는 바람에 목이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면서도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단에게 비난보다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달라는 특별 부탁을 잊지 않았다.
“남편이 중이염을 앓고 있는데도 내색하지 않고 선수단을 이끌었다. 아테네로 출국 전까지 와일드카드 문제와 축구협회의 지원 미비로 인해 속을 끓이는 남편을 보고 한없이 속상했다. 비록 메달은 못 땄지만 열심히 뛴 선수들과 남편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주어진 환경에서 120%의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