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훈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는 꼭 한번은 지도자로서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고 밝혔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다음날 아침, 또다시 전화를 건 김 전 코치. 기자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며 연맹측으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아예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9월10일 빙상연맹으로부터 대표팀의 장비가 김 전 코치의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의 제품으로 교체된 데 따른 비리 의혹을 제기 받고 사직서를 제출한 그는 최근 쇼트트랙 여자대표팀 선수들의 구타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시점에서 자신이 언론에 노출되는 부분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한국체육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만학의 즐거움에 푹 빠져 지내는 김 전 코치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사연 많은 스토리들을 조심스럽게 토해냈다.
전격 사임의 진짜 이유
김기훈 전 코치는 지난 9월10일 대표팀을 이끌고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전 10시, 박성인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뒤 출국하지 않았다. 빙상연맹측에선 김 전 코치가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말했지만 당시 언론에선 좋은 성적을 내고 있던 김 전 코치의 갑작스런 사퇴를 대표팀 선수들이 김 전 코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스케이트화를 사용했다는 것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코치는 아직까지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황당함을 넘어 울분이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한 번도 선수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만든 스케이트화 착용을 강요해 본 적이 없다. 지난 5월, 안현수가 그 스케이트화를 신어보고 싶다고 해서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고 착용 후 만족감을 나타내자 다른 선수가 또 신게 된 것이다. 스케이트화가 바뀐 부분은 연맹에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5월에 있었던 문제를 9월에 와서야 갑자기 의혹 제기를 하고 전지훈련 떠나기 전날 갑자기 기술위원회를 소집해서 징계를 결정한 뒤 자진 사퇴하도록 권고한 부분은 지금까지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김동성 문제가 원인 제공?
김 전 코치는 지난해 김동성의 대표팀 선발과 관련, 연맹측에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대표팀 선발전에 불참한 김동성에게 연맹에선 선수의 자질이 아깝다는 이유로 예외 규정을 만들어 김동성을 ‘어거지로’ 선발했던 것. 그러나 김동성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표팀 합류를 거절했고 막판엔 선수 소집일에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을 이유로 소집에 응할 수 없다며 태극마크를 반납하게 된다.
“그 전에도 동성이는 대표팀 합류후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었다. 몇 차례 주의를 줬지만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대표팀을 선발하는 자리에서 동성이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적극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부분들이 동성이의 귀에 들어갔고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유를 들어 태극마크를 반납한 것이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감독과 선수 사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연맹에선 동성이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이런 일련의 일들이 연맹 입장에선 내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여자 선수들 가슴 아픈 ‘외출’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김 전 코치는 여자대표팀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멘트 달기를 꺼려했다. 김 전 코치는 자신이 대표팀 코치로 있을 당시 이번에 문제가 된 김소희 전 코치와도 함께 선수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가까이서 여자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경쓰며 이런 의견을 내비쳤다.
“쇼트트랙은 개인 종목이다. 한두 명의 선수도 아니고 6명의 선수 전원이 똑같이 행동했다면 그들이 안고 있던 ‘상처’가 치유불능 상태에 도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수습은 됐지만 앞으로 이런 문제가 또 다시 불거지지 말란 법은 없다.”
김 전 코치의 기억에 자리한 여자대표팀은 웃음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맡은 남자대표팀이 자유스런 분위기였다면 오히려 여자대표팀은 통제와 엄격한 규율 속에서 훈련을 해 가끔 주위 사람들로부터 팀 분위기가 서로 뒤바뀐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지금 다시 훈련을 재개했지만 선수들이 아직 어려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곪은 게 터졌고 다행히 선수들이 다시 운동할 수 있게 됐다. 선수들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는데 과거는 빨리 잊을수록 좋다.”
오노와의 인연 또는 악연
1999년 김 전 코치는 미국주니어대표팀을 잠깐 동안 봐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미국대표팀 선수들과 인연을 맺고 그 가운데 친분을 맺은 사람이 그 유명한 안톤 오노였다. 2000년 전주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석한 오노는 김 전 코치를 찾아와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시키는 등 친근감을 과시할 정도였다. 당시 김 전 코치는 오노가 스케이트를 타는 걸 보며 체력과 기능면에서 대단한 실력을 갖춘 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인연인 줄 알았던 오노가 2002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김동성의 금메달을 가로챌 줄 누가 알았으랴.
“미국대표팀에서 줄곧 코치 제의가 있었어요.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 오노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죠. 솔직히 외국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 선수들과 ‘적’으로 만나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더라구요.”
일보 전진을 위해 이보 후퇴 중인 김 전 코치는 기성세대의 복잡한 이권 다툼이나 계산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선수들을 가르치길 소원한다. 2년여에 걸친 짧은 시간 동안 지도자이기 전에 선배, 형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갔던 그는 꼭 한번은 올림픽 무대에 지도자로 서고 싶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연맹의 ‘어른’들이 자신의 순수한 뜻을 곡해할까 싶어 걱정을 놓지 못한다. 김 전 코치가 다 토해내지 못하는 그 ‘비밀’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나 기사를 통해 그 비밀을 전달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