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진은 재기의 그날을 기다리며 눈이 흩날리는 광주 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지난 97년 ‘펄펄 날던’ 시절의 이대진.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6년 동안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며 살았던 그는 자신을 ‘재활 인생’으로 못 박기도 했다. 해태 시절 95~98년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에이스로 군림했고 97년엔 17연승으로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주가를 높였다. 그러나 이후 원인 모를 어깨 통증으로 마운드에서 모습을 감추더니 수술과 재활로 점철된 인생을 꾸려가게 됐다.
이강철, 김진우 등 1진 투수들이 하와이로 모두 떠난 뒤 광주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대진과 가슴이 시리면서도 따뜻한 인터뷰를 나눴다.
은인 지난해 10월 말 일본에서 오른 어깨 회전근 수술을 받고 현지에서 재활 훈련을 한 뒤 연말에 귀국한 이대진은 일본에서 지낸 2개월여 동안의 시간이 30년 인생의 80%를 차지할 만큼 소중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생활이었다고 회상한다.
“비로소 철이 든 거죠. 이전엔 마음을 비운다고 말은 해놓고도 20%도 채 못 비운 때가 허다했어요. 이번엔 80% 정도는 돼요. 승수를 쌓는다거나 팀 우승에 보탬이 되겠다는 등의 거창한 목표는 ‘감히’ 세우지 못했어요.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마운드에서 옛날 폼과 구질대로 공을 던져본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걸 목표로 삼으니 한결 편해지더라구요. 다 그 형 때문이에요. 돗토리현에서 재활 훈련하며 만난 재일동포 형 덕분에 이게 가능해진 거죠.”
이대진이 말한 그 ‘형’은 재일동포인 사업가 송정무씨다. 돗토리현 재활센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가 우연히 훈련중인 이대진을 발견했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끝에 서로에 대한 호감을 느끼다 송씨가 도쿄의 집으로 이대진을 초대하면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형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어요. 사회 생활을 알게 된 게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깨달은 거죠. 그 형이 제 맘을 움직였어요. 야구를 통해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버렸어요. 내가 목숨과 바꿀 만큼 좋아했던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게 됐죠.”
인생=재활 이대진은 지난해 일본으로 수술을 받으러 떠나기 전 심각하게 야구를 포기할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99년 하와이 전지훈련 도중 오른쪽 어깨에 이상이 생긴 이후 수술과 재활을 반복한 고통의 시간들을 다시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것. 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술 후 이전의 체력을 회복하리란 보장이 전무한 상태에서, 고행길에 접어들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수술보다 재활이 훨씬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재활보다 더 힘든 건 자신감 회복이에요. 자꾸 경기장 밖으로 떠돌다보니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안 들더라구요. 차라리 이 지겨운 거 그만두고 다른 인생을 살아볼까 싶었죠. 솔직히 할 게 없었어요. 야구만 했던 놈이 할 거라곤 야구밖에 없더라구요.”
95년 14승, 96년 16승, 97년 17승에 다승왕 후보에 오르고 특히 98년에는 10타자 연속 탈삼진에 1경기 16탈삼진 등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선동열의 대를 잇는 ‘국민투수’감이라고 평가받던 이대진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자취를 감춘 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프로에 발만 담그고 온전히 선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세월의 연속은 그를 지독히 외로움에 떨게 만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인생 자체가 재활이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처음 1년을 제외하곤 익숙해졌어요. 직장인들 출퇴근하는 것처럼 저도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출퇴근해서 재활훈련에 매달렸거든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죠. 가장 그랬던 게 쓸쓸함? 외로움? 뭐 그런 것들이었어요.”
타자 생활 이대진은 2002년 5월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잠실 LG전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주자일소 중월 3루타를 뽑아냈다. 시즌 10타석 만에 이룬 첫 안타이자 결승타였다. 그러나 화려한 팡파르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시즌 다시 투수로 돌아왔기 때문.
그런데 타자 생활하면서 점점 어깨가 좋아지고 있다는 걸 절감한 이대진은 다시 투수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위에선 타자하다 안 되니까 다시 투수한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구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전 타자를 하면서 야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투수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죠. 혹시 이런 기분 아세요? 처음 타석에 섰을 때 포수가 홍성흔이었어요. 물론 그 친구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전 굉장히 쪽팔렸어요.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아, 그 기분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야구와 돈 93년 해태에 입단했으니 어느덧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2년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그런데 이대진의 연봉은 7천만원이다. 다른 선수 같았으면 FA 자격이 되고도 한 번 더 ‘타먹을 수 있는’ 경력이다. 그러나 데뷔 12년이 지났는데도 그 흔한 연봉 1억원에도 오르지 못했다. 배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같은 팀의 9년차 장성호가 3억5천만원의 연봉을 받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액수였던 것.
“당연한 결과죠. 한 게 없으니까.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미련 없어요. 배도 안 아프고. 난 돈을 벌기 위해 야구를 한 게 아니었어요.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만약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면 10억원을 주고 야구를 하면 1억원을 주겠다’고 딜을 해올 경우 난 선뜻 야구를 택할 거예요. 만약 일본에서 그 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10억원에 더 집착했겠죠. 지금은 내 길이 너무 분명해요.”
나이와 등번호 이대진은 해태 입단 후 줄곧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있다. 부상으로 시달릴 때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싶진 않았는지, 그런 말들이 나돌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냈다. 그러자 이대진은 “여기 있어도 매일매일 트레이드된 느낌인데요?”라며 이런 소회를 밝힌다.
“내가 한창 잘나갈 때 같이 운동했던 선동열, 한대화 선배 등은 이미 모두 팀을 떠났어요. (이)종범이 형 말고는 없어요. 수술과 재활했다가 팀에 복귀하면 새로운 선수들이 들어왔고 또다시 재활갔다가 돌아오면 또 처음 본 선수들이 득시글대요. 그러니 매번 새로운 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죠.”
“상진이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끔 잘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상진이 번호를 달고 언론에도 소개되고 방송에 나오는 등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면 상진이도 진짜 기뻐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잖아요. 그래서 번호를 뗐는데 한편으론 홀가분하고 또 다른 쪽에선 섭섭하고 그러네요.”
김상진이 떠난 자리는 우연히 김병현이 대신하게 됐다. 2000년 미국 LA에서 수술 후 재활훈련 때 김병현을 알게 된 이대진은 그후 김병현이 귀국해서 언론과 숨바꼭질을 벌이며 ‘전쟁’을 벌일 당시 든든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대진은 남자만 좋아(?)하지 않았다. 2년간 교제한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지만 만약 결혼을 한다면 그 여자랑 할 것이라는 부연 설명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을 대신 표현한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무조건 나한테 져줘요. 힘들 때 만났는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준 마음씨 예쁜 여자”라며 대놓고 자랑이다.
마지막으로 이대진에게 소원 한 가지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안 아플 때 딱 한 시즌만 제대로 던져보고 싶어요. 딱 한 시즌만!”
그 말이 너무나 간절한 울림으로 전달돼 왔다.
이대진은?
93년 해태 타이거스 입단
95년 14승 96년 16승
97년 17승 골든글러브
98년 10타자 연속 탈삼진
1경기 최다 16탈삼진 기록
당시 ‘국민투수’급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