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닝’ 얘기로 친목 다진 후 무법질주 ‘부아앙~’
외제차 동호회의 폭주 장면. 사진제공=노원경찰서
지난 12일 오후 9시께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 인근 주차장. 고급 자동차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페라리와 포르셰, BMW M시리즈, 벤츠의 스포츠 세단인 C63 AMG, 아우디 R8과 닛산 GTR 등 고가의 수입차부터 제네시스 쿠페와 SM 시리즈 등의 국산차까지 총 13대가량의 자동차들이 일렬로 정렬했다. 군데군데 스티커를 붙이거나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광색으로 도색한 차량도 있었다. 흡사 고급 승용차 전시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한 자동차 동호회 회원들이었다. 일명 ‘투어링 번개 모임’을 위해 모였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모여 경기도 가평군의 청평대교까지 가는 코스였다. 안면이 있는 이들은 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신입 회원은 주최자를 찾아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형 스피커 등 오디오 장치를 설치한 자동차에선 음악의 볼륨을 높아지기 시작했고, 차량의 전조등이 어두운 주차장의 조명을 대신했다. 일부 차량의 조수석에는 미모의 여성들이 화장을 고치며 앉아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어링 번개’라는 목적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얘기가 이어졌다. 자연스레 이야기의 주제가 자동차 튜닝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 이날의 주인공은 휠을 새로 바꾼 BMW 320d였다. 번쩍이는 휠을 알아본 회원들이 하나 둘씩 차량 근처로 모여들자 차주는 “휠 교체하는 데 2000만 원을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모임에 참석한 한 회원은 “번개를 하면 보통 튜닝 정보를 공유하고, 운전석에 앉아 보거나 앞서의 BMW 차주처럼 회원들 앞에서 자랑을 하기도 한다. 쉽지 않은 튜닝 작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달벙(달리기 번개 모임)을 위해 차량들이 모여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계 없음.
실제로 이날 모임에 나온 차량들의 상당수는 튜닝을 한 상태였다. 한 군데도 튜닝을 하지 않은 취재 차량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특히 튜닝한 회원들의 차량은 휠이나 외관은 물론, 자동차 토크와 출력을 높이기 위한 개조가 대부분이었다. 엔진을 제어하는 ECU를 조작한 ECU 맵핑(튜닝)과 흡기구 배기구를 개조한 흡·배기 튜닝은 ‘기본’으로 한 상태였다. 심지어 한쪽에선 공구를 꺼내들고 즉석에서 불법 개조를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회원들도 “모임을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이야기가 점점 마무리 돼가자, 모임의 주최자는 “이제 출발한다”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량들의 전조등이 약속한 듯 하나둘 씩 켜지더니, 일제히 시동이 켜지기 시작했다. 순간 주차장에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차량 튜닝 등으로 배기량을 늘려놓은 터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취재 차량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행렬의 후미에 끼었다.
회원들은 도로에 올라서자마자 하나같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취재 차량도 그들을 따라가려 덩달아 속도를 올렸지만 이내 앞차는 멀찌감치 멀어져 갔다. 뒤에서 오던 차들은 취재 차량을 추월해 지나쳤다. 같은 시간, 같은 도로 위에는 다른 일반 차들도 많았다.
이들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의 춘천방향 가평휴게소였다. 주최자는 “본격적으로 주행하겠다”며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은 차량이나 원치 않는 차량은 천천히 따라오라”고 말했다. 주최자의 지휘 아래 휴게소를 빠져나간 차량들은 중간에 정렬을 하며 ‘그룹 주행’을 했고, 이 과정에서 조수석에 앉은 회원들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달리던 일부 차량들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반면 일부 차량들은 그대로 속도를 유지하며 추월해서 앞서 나갔다. 이렇게 약속이나 한 듯 차량 그룹이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취재 차량은 속도를 유지하며 추월해 나가는 차량 그룹과 함께 움직였다. 어느 정도 달린 추월 차량 그룹은 속도를 늦춘 선두차량 그룹과 멀찌감치 거리를 둔 지점에 다다라 갓길에 차량을 일렬로 정차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속도를 늦췄던 선두차량 그룹이 굉음과 함께 멀리서 달려오더니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의 ‘폭주’는 춘천 방향과 돌아가는 서울 방향에서 각각 1시간가량씩 반복됐다.
폭주족 블랙박스에 찍힌 추돌사고 장면. 사고 차량 모두 폭주족 차량이다.
그는 “차선이 넓고 직선 주로가 많은 곳에서 모여 최대 속도로 400m를 달리는 드래그 레이스라는 게임도 있다. 초기 가속 능력과 최대 토크, 출력 등을 비교할 수 있어 자동차의 100m 달리기로 불린다”며 “대부분 400m를 11초대에 주파한다”고 귀띔했다. 이는 시속 218km에 이르는 것으로, 보통 승용차로는 아무리 밟아도 도달하기 어려운 속도라고 한다. 그는 또 “드래그 레이싱은 보통 차량으로도 하기 쉽다. 변속시점과 변속속도 등 기술적인 면도 중요 하지만 400m의 직선을 달리기만 하기 때문에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차량 폭주에 대해 경찰은 회원들이 자동차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로 자기 자존감을 확인하고,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 자동차 폭주 단속에 참여했던 한 경찰 관계자는 “일부 자동차 동호회 카페를 보면 종종 회원 전용 클럽 파티를 열고 ‘수입차를 몰고 와 옆 좌석에 멋진 아가씨들을 앉혀서 돌아가라’는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고 귀띔했다.
또한 수입차 동호회 사이의 경쟁심도 단속을 무시한 레이스가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과거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수입차 사이트 게시판에 다른 자동차 동호회 회원들이 레이스 동영상을 올리며 ‘한번 겨뤄보자’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 드래그 레이스로 불붙은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여기에 국산차 튜닝 동호회도 수입차들과 붙어보자며 끼어들어 경쟁 구도가 더욱 복잡해졌다”고 전했다.
한 자동차 동호회 회원은 “최근 튜닝 산업 규제가 완화되면서 마니아뿐만 아니라 튜닝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이 늘기 시작했다”며 “동호회에 가입해 튜닝을 알아보거나 개조하다 보면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 불법 레이스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러한 자동차 폭주 단속을 위해 서울경찰청의 ‘폭주족 수사팀’을 ‘교통범죄 수사팀’으로 확대 개편하고, 일선 경찰서 4곳에도 수사팀을 새로 설치했다. 그렇지만 불법 레이스를 즐기는 일부 동호회 회원들도 단속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동호회 회원들은 ‘달벙(달리기 번개)’ ‘커벙(커피 번개)’ 등의 은어로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모임을 공지하고, 주최자의 연락처나 카카오톡 아이디를 남긴다. 여기에 ‘ㅇㅈㄷㄹㄱA지역’(영종도 드래그) 등의 암호를 써가며 인터넷 카페와 SNS 등으로 간단히 장소를 지정하기도 하고, 심지어 무전기를 쓰기도 한다. 앞서의 한 자동차 동호회 회원은 “단속에 걸렸을 경우에도 회원들끼리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진술하기로 암묵적인 약속이 돼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경찰도 자동차 폭주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 2013년 서울경찰청은 ‘폭주족 수사팀’을 ‘교통범죄 수사팀’으로 확대 개편하고, 일선 경찰서 4곳에도 수사팀을 새로 설치했다. 올해부터는 순찰차가 아닌 일반차량에 탑승한 경찰관이 캠코더 촬영으로 난폭운전 자료를 수집하는 ‘비노출 단속차량’을 도입해 폭주 행위 단속과 예방에 나서고 있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과속 운전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와 영종도, 자유로, 사패산 터널 등 자동차 폭주가 빈번한 도로에 단속이 강화되면서 불법 레이스 집결지가 변화하고 있지만, 동호회와 집결지 등을 중심으로 단속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진짜 부유층은 따로 논다 일반도로 No! 태백서킷으로 Go~ 그동안 드래그 레이스, 롤링 등 자동차 폭주 단속에 적발될 때마다 세간의 이목은 차주들이 몰고나온 차량에 집중됐다. 수억 원대의 수입차 가격과 그에 견줄 만한 비용이 들여 튜닝한 ‘슈퍼카’들이 대거 등장한 탓이다. 또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종종 적발되기도 하면서 “돈 있는 사람들이 자동차 불법 레이스를 한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서 레이스를 하고 있다. ‘부유층 자제’들의 차량을 개조한 경험이 있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튜닝 업체 사장은 “일반적으로 이들(부유층 자제들)의 외제차 모임이라고 정해져 있는 동호회는 없다. 개인적, 사회적 친분 등으로 알게 된 사람들끼리 비공식 모임을 가질 뿐이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들은 일반 동호회처럼 인터넷 카페나 SNS를 통해 ‘몇 월 며칠 어디서 모임을 갖는다’는 식으로 모이지 않는다. 튜닝샵에 와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면 ‘오늘 뭐하냐’고 안부를 묻다가 ‘약속이 없다’고 하면 ‘그럼 오늘 한번 달릴까?’ 이런 식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앞서의 자동차 폭주족처럼 일반 도로를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의 튜닝 업체 관계자는 “태백에 레이싱경기장이 있다. 태백 경기장은 우선 선수 라이선스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이 레이싱 코스를 이수했다. 일부는 레이싱팀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레이싱 선수를 하지 않을 뿐, 실력들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