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돈’ 수천만원 지르는 ‘쩐의 전쟁’ 시작됐다
안심번호 시행으로 총선 예비후보자들의 경선비용이 급격히 증가했다. 지난 25일 새누리당 예비후보 면접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공동취재단
“판돈을 안 내놓고 베팅을 할 순 없다. 일종의 참가비이자 베팅비다. ”
지난 24일 <일요신문>과 만난 여론조사 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베팅비’는 경선비용이다. 그는 “경선을 하려면 전화나 ARS 여론조사를 해야 하는데 사실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며 “특히 안심번호를 하면 일단 전화번호 DB를 이동통신업체에서 사와야 하고 비용이 든다. 그 다음 선거인단 모집에 또 돈이 들어간다. 지역구당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한다. 경선에 참여하는 후보자들이 나눠서 부담한다. 금액 차이는 있겠지만 원리는 그렇다”고 설명했다. 예비후보자들이 호기롭게 선거에 출마해도 선거운동 기간 내내 ‘쩐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안심번호’는 정당이 당내 경선에 필요한 선거인단을 모집하거나 여론조사를 할 때 휴대전화 사용자의 개인 번호가 드러나지 않도록 이동통신사업자가 가상의 전화번호를 제공하는 제도다. 이동통신사업자가 일회용 가상번호를 부여한 유권자 명단을 제공하면 정당이 가상의 번호로 유권자들에게 연락하는 방식. 연락을 받은 유권자는 당내 경선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후보에 지지를 보낼 수 있다.
지난해 9월 28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더민주 대표는 안심번호를 활용한 국민 공천제 도입에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월 15일 신설된 공직선거법 제57조의 8은 당내 경선에서 안심번호를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개인 신상정보의 노출과 고의적인 역선택, 조직 동원의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서 처음으로 시행한다.
문제는 안심번호의 도입으로 지역구당 여론조사 비용이 수천만 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동통신사업자가 제시한 안심번호의 개당 단가는 330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시행할 경우, 낮은 응답률을 고려하면 필요한 가상번호 수는 최소 3만 개 이상이다. 안심번호 추출에만 총 990만 원의 비용이 든다.
여기에 실제 여론조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추가된다. 여론조사 1건당 비용은 1만 2000∼1만 5000원 사이. 최대 150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안심번호 추출비용’과 ‘여론조사 비용’을 합한 비용만 무려 약 2000만 원이다. 샘플 수나 문항 수가 늘수록 조사비용은 늘어날 수 있다. 이 비용을 예비후보들은 ‘n분의 1’로 각자 부담해야 한다.
결선투표 제도는 예비후보자들을 또 한번 한숨짓게 만들고 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경선에서 결선투표 제도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경선 비용은 더욱 늘어날 수 있다. 새누리당은 1, 2위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10%포인트(p)이내, 더민주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는 경우 결선투표를 거칠 예정이다.
예비후보 한 사람이 등록부터 결선투표까지 치른다고 가정하면, 수천만 원대 비용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예비후보자들이 경선 비용을 나눠서 부담한다고 해도 그리 만만한 비용은 아니다. 앞서의 여론조사 업체 관계자는 “경선 비용이 두 배로 확 뛰었다고 보면 된다. 정당이 후보자에게 이 부분을 떠넘기는 행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자 공천 면접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공동취재단
선거공영제도 그림의 떡이다. 공직선거법상 선거공영제는 경선비용에 적용되지 않는다. 본선 후보로 등록한 뒤 사용한 선거 비용만을 국고로 지원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정치 신인’들이 어려움을 호소 중이다. 더민주의 한 예비후보는 “금시초문이다. 안심번호 추출비용을 후보자에게 부담시킨다는 당의 공지를 받은 일이 없다”며 “공천을 신청할 때 낸 비용에 포함돼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새누리당의 다른 예비후보 역시 “당에서 그런 공지를 한 적이 없다”며 답답해했다. 예비후보들이 급하게 돈을 융통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경선비용에 대해 더민주 관계자는 “경선비용은 원래 후보들의 부담이다. 안심번호를 도입하면 기존의 여론조사보다 샘플수가 늘어나니까 비용이 조금 늘긴 할 거다”면서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국민참여경선 등 후보자들끼리 경선 룰에 대한 합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조정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돈이 부족하면 선거를 못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안심번호 때문에 샘플이 늘어나 경선비용이 많이 들진 않는다. 오히려 옛날 체육관 선거 비용보다 적게 든다”며 “예비후보들 전부가 경선을 치를 수도 없고 지역구마다 숫자도 다르기 때문에 경선비용을 전부 공지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다른 의견을 드러냈다.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안심번호 제도가 ‘변질’될 수 있다는 것. 앞서의 여론조사 업체 관계자는 “안심번호를 사용하면 정당 입장에선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돈이 안 들까. 체육관 경선처럼 지역 조직을 동원하는 비용은 똑같이 들 수 있다”며 “여야 지도부는 지역 유권자 전부를 매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든다는 입장이지만 안심번호를 부여받은 새누리당 지지층 대상으로 1만 명만 매수해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수수방관 중이다. 현행법상 당내 경선 비용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 선관위는 경선비용 관리를 여야 정당들에게 일임하고 있다. 선관위 관계자는 “경선 비용은 정당에서 관리한다. 우리랑은 관계가 없다. 등록비나 공천심사비는 정당에서 금액을 정하고 있다. 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에 그런 규정은 없다”며 “경선비용이 정당마다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후보자의 기탁금만 관리하고 있다. 공직선거법에 규정됐기 때문이다. 안심번호 전환으로 경선 비용이 증가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고 밝혔다.
20대 총선은 ‘쩐의 전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 지역구 캠프의 한 당직자는 “선거는 전쟁이다. 뭣 모르고 선거에 뛰어들었다가 돈 때문에 피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총선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공약과 인품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돈이다”며 “게임의 룰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치신인들은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다. 우리 캠프만해도 경선 예산만 3800만 원 이상 잡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