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남자그린에서 세월의 시계가 잠깐 거꾸로 갔다. 지난달 17일 제주도의 스카이힐골프장. 2005시즌 한국남자프로골프협회(KPGA) 개막전인 스카이힐오픈 최종 4라운드가 열렸는데 마지막 챔피언조로 플레이한 선수가 김종덕(44·나노소울) 최상호(50·빠제로) 박남신(46·테일러메이드) 3명이었다.
평균 나이 47세. 최상호 42승, 박남신 19승에 이날 2위와 9타차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국내 최고령 우승(종전 41세·최상호 96년 영남오픈)을 달성한 김종덕의 7승을 포함하면 이들 3명의 통산 승수만 해도 무려 68승이다.
당사자들도 티오프전 특별 기념촬영을 하고, 파이팅을 외쳤을 만큼 감개가 무량했다.
이번주 주제는 최상호다.
가요계는 조용필, 영화배우는 안성기, 축구는 차범근 뭐 이런 식으로 어느 분야건 특정 분야의 한 스타가 독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승용차도 포니였던 시절이다. 바로 이 시절 남자골프는 최상호의 시대였다. 물론 조금 후 박남신이라는 근사한 2인자도 거느렸다.
다음은 골프라이터로 20년을 넘게 활약한 한 선배의 말.
“프로들 연습량은 엄청나.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지. 가끔 드라이버 헤드가 깨지거나 구멍이 날 정도야. 근데 말이야, 언젠가 최상호의 퍼터를 보니까. 퍼터 한가운데, 그러니까 우리가 스윗스팟이라고 부르는 정가운데에 살짝 구멍이 나 있더라구. 상상이 돼? 얼마나 퍼팅 연습을 많이 했으면 퍼터에 구멍이 생길 정도인지….”
최상호는 71년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경기도 고양의 한 연습장에서 볼 쿠폰을 팔던 ‘골프장 캐셔’로 출발해, 고교 졸업 후 캐디를 거쳐 프로에 입문한 전형적인 과거지향형 골퍼다. 체격도 170cm로 왜소하다. 그런 탓인지 폼도 정석과는 거리가 멀다. 비거리는 짧은 편이고, 트레이드 마크인 퍼팅 어드레스 자세도 처음 보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특이하다.
엄청난 노력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국내 그린을 평정한 그에게 ‘한국골프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골프의 산역사’ ‘기록 제조기’ ‘연습벌레’ ‘냉혹한 승부사’ ‘최태백’ 등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랐다.
사실 최상호는 지난해 말 남몰래 미국으로 갔다. 소리 소문 없이 미국 챔피언스투어(이전 시니어투어)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했던 것.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만 50세 이상 스타들이 따로 모여 투어를 벌이는 곳. 박세리, 박지은, 소렌스탐 등이 활약하는 미LPGA보다 인기나 상금규모가 많다.
만 50세가 되는 해를 앞두고 최상호는 미국 진출을 결심했고, 바로 Q스쿨에 도전했던 것이다. 결과는 1타차로 아깝게 최종예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념의 골퍼다운 도전이었다.
이쯤에서 구닥다리 같은 말 하나 해야겠다. 예전에 비하면 부러울 것이 없는 한국의 골프 유망주들이 최상호의 구멍난 퍼터를 꼭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좋은 상황에다가 최상호의 집념이 더해진다면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골퍼가 배출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스포츠투데이 골프팀장 einer@stoo.com
온라인 기사 ( 2024.12.11 1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