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대이을 ‘작품’ 한창 작업중”
▲ 오인환 감독은 ‘만취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라이프스토리를 하나둘 꺼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오 감독이 자주 간다는 서울 석촌호수 부근의 ‘금강’(굳이 업소명을 밝힌 것은 이곳의 실장이 <일요신문> 광팬이었다)이라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음식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먼저 술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오 감독은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한번은 오십세주(소주+백세주)를 마신 후 기절하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는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주량이 소주 두 병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푹 놓였다. 어느 감독보다 비교적 ‘상대하기가’ 수월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나중엔 이런 단순한 생각이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됐지만.
증권회사 체육팀에서 활동하다가 부천시 순회코치로 자리를 옮긴 오 감독은 87년 코오롱스포츠 홍보팀에 입사, 육상 현장이 아닌 회사원으로 또 다른 생활을 시작했다. 어찌보면 코오롱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게 오 감독한테는 마라톤 지도자로 거듭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93년 말, 오 감독은 코오롱 육상팀에서 남자마라톤 코치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코오롱 마라톤팀은 황영조가 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잠시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데 고 정봉수 감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 감독의 뒤를 이을 만한 코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 감독님의 배려로 육상팀에 합류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정 감독님이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고 좀 괴팍한 성격이라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 새벽 5시 반에 아침 운동을 시작하는데 자주 나오시진 않지만 언제 나오실지 몰라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죠.”
오 감독을 힘들게 한 건 정 감독의 선수 관리 스타일의 차이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 있었던 데 따른 선수들과의 거리감이었다.
“선수들은 처음에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격지심도 생겼죠. 극복해야할 문제였어요. 금메달 딴 황영조는 목에 힘 팍팍 주고 다녔지, 이봉주도 당시 나랑 같이 입단했는데 이미 성장한 선수라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어찌보면 정 감독님, 황영조, 나, 이렇게 셋 사이에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해요. 지금 그 사연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요.”
오 감독의 눈에 비친 황영조와 이봉주의 운동 스타일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 대치동에 코오롱 숙소가 있었는데 개포동에서 세곡동까지 달리기를 하면 황영조는 중간에 포기하는 게 다반사였고 이봉주는 단 한 번도 포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경주 동아마라톤대회. 그동안 정 감독은 황영조를 전담했고 오 감독은 이봉주와 김완기를 맡아서 각자 따로 훈련을 시켰다.
▲ 오 감독과 기자 그리고 오 감독 단골업소의 실장. | ||
술김에 이렇게 질러봤다. “만약 황영조 감독(국민체육진흥공단)이 그때 은퇴 안 하고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오 감독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너무 민감한 질문이라면서. 지금도 황영조 감독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제지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을 꺼내기가 어렵기만 한 모양이다. 오 감독도 술김에 이렇게 풀어냈다.
“영조는 승부근성도 좋고 타고난 기량이 출중했어요. 대신 너무 ‘끼’가 넘쳐났죠. 마라톤과 그 외의 일을 다 소화해내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만약 봉주처럼 감독의 지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운동을 했다면 여러 차례 기록 경신을 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신은 공평한 것 같아요. 영조에게 없는 순종 정신이 봉주한테는 있었거든요. 봉주는 그게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마라톤을 하고 있는 거죠.”
취기가 점점 오르는 걸 느끼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아직도 코오롱 시절을 얘기하고 있으니 삼성전자까지 오려면 아직도 10년이란 세월이 남아 있었다. 술 마시는 걸 떠나서 빠른 진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오 감독에게 코오롱을 이탈한 선수들과 어렵게 훈련했던 과정과 배경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봉주가 98로테르담대회에서 한국 최고인 7분대를 기록하고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승승장구하자 정 감독님 입장에선 조금 불편하셨던 모양이에요. 기자들도 자꾸 날 부각시키는 내용들을 다뤘고. 감독님께서 어느날 날 부르시더니 팀을 떠나라고 하시더라구요.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또 때마침 이봉주가 팀을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서운했던 건 내가 직접 사표를 써서 나갈 수 있었는데 감독님이 미리 사표를 써 왔다는 거예요. 정말 서글펐습니다. 아마 그때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오 감독이 팀을 떠나자 선수들이 동요했다. 미리 팀을 나온 이봉주와 나머지 선수들도 숙소를 이탈해 오 감독을 찾아왔다. 오 감독 입장에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판단, 선수들을 으르고 달래서 숙소로 다시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팀에서 선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오 감독은 코오롱을 나온 선수들과 함께 코치, 이봉주,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보령과 고성, 대천 등을 오가며 훈련을 시작한다.
▲ 황영조 선수(왼쪽)와 이봉주 | ||
취재기자나 취재원이나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봉주란 이름에 지도자의 존재가 가려있는 ‘가끔의’ 현실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물었다. 다음 내용은 취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오 감독의 솔직한 생각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봉주가 있기 때문에 오인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이봉주의 감독이 아닌 삼성전자 육상팀의 감독이란 자부심이 있어요. 오인환 이름 앞에 이봉주란 걸출한 스타의 이름이 붙는 게 때론 자랑스럽지만 또 때론 부담스러울 때가 분명 있거든요. 삼성이란 조직에 들어와서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성적에 대한 강박관념도 많았어요. 그래도 어렵게 만들어진 육상팀을 아우르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들을 잘 견뎌낸 것 같아요. 그런 내 공보단 이봉주의 감독으로만 비춰지는 건 좀 안타까운 부분이죠.”
오 감독은 이봉주의 스피드 강화를 위해 이봉주가 꺼려하고 마다했던 5천m 출전을 강하게 권유했다고 토로한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두 대회는 물론 오는 6월11일 기흥의 삼성전자 육상 트랙에서 열리는 삼성디스턴스챌린지 등에 또다시 출전하는 이봉주는 모두 트랙 선수로 뛴다. 이 모든 게 스피드를 끌어올린 후 체력 보강 훈련 뒤 하반기 베를린이나 시카고 마라톤대회의 도전 여부를 결정짓겠다는 계획에서 나온 과정들이다.
“이봉주 대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에요. 이게 내 ‘숙제’이기도 하면서 강박관념이 들게 해요. 실업팀 지도자 생활 13년째인데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마 여자팀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지도 몰라요. 지금 뭔가를 한창 ‘작업’ 중이거든요.”
국내 육상계에 고지훈련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마라톤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법과 선수의 몸에 맞는 훈련법으로 일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던 오인환 감독. 고 정봉수 감독이 한국 육상계의 ‘큰별’이었다면 오 감독은 ‘큰손’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직 그가 은퇴하려면 멀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