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 돼준 ‘내팬’ 있기에 행복합니다
▲ 술이 얼큰해진 기자와 장종훈. 장종훈과의 취중인터뷰는 3시간이 넘는 긴 게임으로 진행됐다. | ||
‘기록의 사나이’ ‘촌놈’ ‘홈런왕’ 등 다양한 수식어들을 안고 한화 유니폼을 입은 장종훈(37)은 유니폼이 아닌 일반 직장인들의 또 다른 ‘교복’인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야구장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훨씬 인간적이고, 훨씬 재미있으며, 훨씬 매력적이었던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과의 ‘취중토크’를 정리해 본다.
1회초 발동을 걸다!
삼겹살이 채 익기도 전에 술잔이 오갔다. 애당초 서로 안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첫잔을 원샷으로 끝낸 뒤, 장종훈이 이런 말을 한다.
“야구하면서 ‘취중토크’는 처음 해봐요. 은퇴하니까 이런 것도 다 해보네. 난 기분 나쁘면 술이 잘 안 들어가요. 기분 좋으면 한순간에 가고.”
세광중학교 1학년일 당시 학교 선배인 송진우가 졸업을 할 때였다고 한다. 그때 졸업식을 마치고 야구팀 전체가 뒤풀이를 하기 위해 중국집을 찾았는데 그때 장종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셔봤다고 한다.
“엽차 잔 같은데다 이술, 저술, 막 섞어서 먹었어요. 한 열 몇 잔을 마신 것 같은데 취하질 않더라구요. 솔직히 취할 수도 없었죠. 그렇게 까불면 선배한테 얻어 터지니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마시면서 주량이 는 타입이다. 그런 특징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장종훈이 옆에서 ‘술만’ 마시던 한화 홍보팀 임헌린씨에게 갑자기 이런 한탄을 늘어놓는다.
“아, 술 느는 것처럼 야구도 그렇게 늘었다면 지금쯤 박찬호를 능가하는 스타가 됐을텐데 말이야 응?”
3회초 ‘담배스토리’ 파울
‘범생이’ ‘바른생활의 사나이’로 특징지어진 장종훈에게 술 얘기를 꺼내면서 시작한 인터뷰가 또 다시 담배를 화제로 삼자, 미안해하는 기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장종훈이 이렇게 위안을 준다.
“이병훈 해설위원 알죠? 나랑 동기거든. 그 앤 나만 보면 ‘어이, 바른 생활의 사나이’하면서 불러요.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이렇게 비웃어요. ‘야, 니가 내 생활을 알아?’ 무슨 말인지 아시죠?”
모르겠다. 장종훈의 설명이 이어진다. 장종훈은 어느 순간부터 팬들이 자신을 ‘범생이’로 보는 시각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담배를 피워도 ‘장종훈이 어떻게’라며 의아해 하는 시선들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
▲ 사인하는 장종훈. | ||
17년 넘게 피운 담배를 끊은 계기는 큰아들 현준이의 멘트 때문이었다. 어느날 장종훈 옆으로 다가와선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아빠한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나요”라며 코를 부여잡더라는 것.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은 장종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난 개인적인 목표가 내 후손들 보고 죽는 거예요. 그러려면 오래 살아야되잖아요. 오래 살려면 담배를 끊어야 되고. 금연패치 붙이고 10일 만에 끊었어요. 그랬더니 선수단 라커와 화장실에 내 사진이 붙었더라구. 금연 모델로. 하하.”
‘담배스토리’ 파울
야구도 5회 끝나고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듯이 ‘취중토크’도 소주잔 부딪히기를 잠시 멈추고 다소 심각한 얘기를 물어볼 시간이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해명을 했지만 여전히 팬들은 장종훈의 은퇴 배경에는 김인식 감독과의 불화가 작용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말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2군에서 롯데와 게임을 하러 부산을 갔는데 롯데 2군 코치로 있는 공필성을 만났어요. 그때 나도 필성이한테 ‘야, 필성아,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혹시 너 감독하고 사이가 안 좋냐?’라고 물어봤어요. 다시 한번 분명히 얘기할 게요. 은퇴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한화라는 팀에 더 이상 내가 설 자리가 없었어요. 그리고 내 입으로 먼저 은퇴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요.”
장종훈은 돈과도 큰 인연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FA 대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0년 FA가 됐을 때 3년에 7억이 전부였다. 다소 상투적인 질문이었지만 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지를 물었다.
“내가 프로 입단 후 처음 받은 연봉이 4백80만원이었거든요. 그 돈 가지고 생활하면서도 저축할 거 다했어요. 당시에는 야구할 수 있는 데 대해 감사했고 연봉보다도 내 성취감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물론 FA가 됐을 때 아쉬움도 많았죠. 내가 돈 복이 없나 봐요. 뭐, 나중엔 있겠죠. 원망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나만 가슴 아픈 거잖아요.”
대전 지역에 상가를 구입해 알뜰한 재테크 전략을 폈지만 최근 좀 복잡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래도 그의 표현대로 ‘소박한 재테크’를 통해 은퇴 후를 준비했던 부분들이 지금은 많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7회초 10잔 대 12잔
장종훈은 흉내내기 쉬운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니까 그 특징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몇 차례 장종훈의 어투를 흉내내며 기자의 ‘개인기’를 발휘했는데 장종훈이 바로 비웃는다. 술 취한 거 티내지 말라면서.
▲ 1992 홈런의 전설을 쏘다. 1999 우승반지와 키스. 2004 노병은 죽지 않는다.(왼쪽부터.) | ||
“세광중학교 3학년 때 청주야구장에서 OB베어스랑 삼성라이온즈랑 프로야구 경기를 벌였는데 그때 볼보이를 했어요. 그때 선발투수가 박철순 선배였는데 삼성 더그아웃에서 그분 투구하는 거 지켜보면서 ‘야, 프로도 별 거 아니구나’하는 건방진 생각이 들더라구요. 볼 스피드가 상당히 느렸기 때문에 당장 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볼이 포크볼이었더구먼. 하하.”
10잔 대 12잔. 앞의 숫자가 장종훈이 마신 술잔이다. 소주를 잘한다고 해서 계속 원샷을 했는데 마셔보니까 ‘장종훈의 주량도 별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게임이 종료되려면 3이닝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9회초 드디어 역전포!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장종훈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홍보 담당자의 장단에 탄력을 받아서인지 장종훈의 술잔이 거듭 비워졌다. 결국 이번에도 기자의 ‘진도 나가기’에 브레이크가 걸렸고 결국 장종훈이 ‘병권’을 쥐고 분위기를 리드해 나갔다.
“술 마시면서 인터뷰하는 게 장점이 많네. 평소 하지 않던 얘기가 막 나오니까. 내가 한때 대주자로 뛴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지. 장종훈의 이미지와는 너무 안 맞았으니까. 감독님을 원망도 많이 했죠. 이렇게 가면 안 되는 건데, 왜 날 이렇게 내모나 싶어서.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아마도 내 경기 출장수를 늘려주기 위해서 그런 편법을 썼을 거예요. 이젠 나도 코치가 됐으니까 선수들이 나한테 서운해 하거나 힘들어 하는 부분도 많을 겁니다.”
지난 6월17일, 선수단 라커룸에서 짐을 챙겨 코치 라커로 옮겨가면서 장종훈은 차마 말로 표현 못할 감정들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고 한다. 프로 입단 첫 해부터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달려왔던 시간들이 어느덧 20년이란 ‘역사’를 안게 했지만 진짜 마지막 순간에 그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현실 앞에서 잠시 아득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다.
9회말 처음 하는 얘기
“장종훈이란 이름 앞에 항상 붙는 게 ‘연습생 신화’였잖아요. 솔직히 난 그 말이 싫었어요. 물론 출신이 그러니까 어쩔 순 없다고 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연습생 신화’로만 존재하길 바랐거든. 사실 난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내 아이들한테 대학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 그런데 나마저 대학을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대학 나온 아내와 결혼하면서도 학벌 때문에 밀리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학벌 때문에 배우자는 꼭 대학을 나왔음 했다는 하기 어려운 말도 꺼낸다. 고졸 신화로 ‘포장’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했다는 장종훈의 고백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들이 포함돼 있었다.
“난 선동열 감독처럼 엘리트 출신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이만하면 성공한 거 아닌가요? 처음 야구 시작할 때는 정말 보잘 것 없었는데 은퇴한 마당에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마무리 괜찮은 거잖아요? 그런 점에선 팬들한테 진심으로 감사해요. 내 ‘팬’이 아닌 ‘편’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주셨거든요.”
3시간을 넘게 인터뷰하는 바람에 상당히 늦은 시간에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장종훈은 헤어지기 전 선수로 20년 뛰었으니까 지도자로 20년 더 활약한 뒤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 나이 때까지 ‘취중토크’를 진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