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수도통합병원 후송 발표와는 달리 미국인 병원에 먼저 옮겨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된 후 국군병원이 아닌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먼저 후송됐다는 사실이 37년 만에 밝혀졌다.
지난달 23일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는 미국 교포신문 <선데이저널> 기고문을 통해 37년 만에 비밀 해제된 미국무부 2급 비밀전문을 공개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된 직후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이송됐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정부가 박 전 대통령이 피격된 직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됐다고 공식 발표한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안 씨는 기고문에서 “지금까지 정부는 박 전 대통령이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병원 도착 직전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단 한 번도 국군수도통합병원 후송 전 미국인 병원에 먼저 후송됐다는 설은 없었다”면서 “이 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최규하 전 대통령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박 대통령 시해에 미국이 개입됐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이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 비밀전문이 밝혀짐으로써 대파란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공개된 비밀전문은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 장관에게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보고한 내용이 기재된 ‘주한미국대사와 대통령권한대행과의 통화’라는 제목의 미 국무부 2급 비밀전문(전문번호 16336)이다. 이 비밀전문은 지난 2014년 3월 20일부로 비밀 해제됐으며 박 전 대통령 사망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비밀전문 내용에 따르면 최 전 대통령은 ‘10월 26일 오후 6시부터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청와대 인근의 식당에서 박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상, 김계원 비서실장이 만찬을 시작했다. 만찬석상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기 시작했고 박 대통령은 이를 말리려고 했다. 오후 7시 30분쯤 김재규는 총을 뽑아 차지철에게 발사했고 대통령에게도 총을 발사했다.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만찬장에 불이 꺼졌고 김계원에게 불을 켜라고 소리쳤으며 불이 켜졌을 때 박 대통령과 차지철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고 글라이스틴 전 대사에게 알렸다. 또 ‘부상을 당하지 않은 김계원은 박 대통령을 대통령 전용차에 태워 (만찬장의) 근처에 있는 미국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겼고 7시 55분 병원에 도착했다. 비서실장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다시 심장이 뛰지 않았고,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이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도착하기 약 5분 전에 죽었다고 추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비밀전문에 기록된 시간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날인 27일 새벽 2시 21분이지만 그리니치 표준시인 점을 감안해 우리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27일 오전 11시 21분에 발송된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한 건 10월 27일 오전 7시 23분이다. 비밀전문에서 최 전 대통령이 글라이스틴 전 대사와 통화한 시간은 오전 8시께로 추정돼 김 전 장관이 공식 발표한 시간보다 30여 분 이상 늦다. 그렇다면 최 전 대통령은 왜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과 다른 내용인 ‘박 전 대통령이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후송됐다’는 내용을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알린 것일까. 이에 대해 안 씨는 “대통령권한대행인 최 전 대통령이 우방관계인 미국 대사에게 허튼 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며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에 반대한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상태였음을 감안, 정부가 박 전 대통령을 미국인 병원으로 먼저 후송했다고 밝힌다면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과 미국이 관련이 있건 없건 간에 반미감정이 들불처럼 번졌을 것”이라며 “병원으로 후송한 김계원 전 비서실장이 아직 생존해 있기에 역사 앞에 진실을 밝혀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가 자신의 블로그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공개한 미 국무부 비밀전문.
김 전 문공부 장관은 10월 27일 오전 7시 23분 중앙청 기자실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26일 저녁 6시경 시내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하시어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만찬을 드시는 도중에 김 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 간에 우발적인 충돌사태가 야기되어 김 중앙정보부장이 발사한 총탄으로 26일 저녁 7시 50분경 서거하셨습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총탄을 맞으신 직후 김 비서실장에 의해 급거 군서울병원에 이송됐으나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에 운명하신 것으로 원장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김 전 문공부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이 병원으로 이송된 시간과 도착 시간을 밝히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10월 27일 오전 4시 22분경 김 전 문공부 장관은 기자실에서 발표문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읽은 후 “발표문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당시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 공소장에는 ‘19시 55분경 대통령의 승용차로 대통령 유해를 국군서울지구병원에 후송해 당직 군의관 소령 송계용에게 진단케 한 바 ‘이미 5분 전에 사망하셨다’는 것을 확인’이라고 명시돼 있다. 또한 <경향신문>은 ‘차량은 궁정동을 출발해 내자호텔과 광화문을 거쳐 3·1 고가도로와 후암동을 지나 미8군 영내도로를 통과해 20시 5분경 육본벙커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최 전 대통령이 글라이스틴 전 주한미국대사에게 보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박 전 대통령은 궁정동에서 육군본부까지 이동하던 도중 미8군 영내도로 인근에 위치한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후송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지난 2005년에 방송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국군수도통합병원에 10월 26일 저녁 7시 59분에 도착한 것으로 묘사됐다. 김 비서실장도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이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겼다고 진술했다.
한편 글라이스틴 전 주한미국대사는 최 전 대통령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는 자정쯤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았고, 새벽 2시쯤 상세한 상황을 알게 됐다. 미국은 어려운 시기에 문민정부를 이끌어 가기 위한 최 대통령의 노력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사의를 표했던 것으로 비밀전문에 적혀있다.
유시혁 기자 evernur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