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지더라도 통쾌한 야구 계속”
▲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연승으로 눌렀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4연패를 당하며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두산. 이 충격으로 11일 간 잠적했던 김경문 감독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기자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쾌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그는 이미 ‘통큰 감독’ | ||
그동안 애써 인터뷰를 피하며 한국시리즈의 후유증을 혼자서 겪고 쓰라림을 삭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김경문 감독이 잠수 끝에 ‘세상 밖으로’ 나와서 처음 기자와 대면했다. 그것도 술자리에서. 전날 술을 좀 ‘쎄게’ 했다는 김 감독과 야구 선배가 운영한다는 곱창집에서 맥주와 소주를 적절히 섞어가며(?) 취중토크를 벌였다.
―한국시리즈 끝나고 뭐하고 지내셨어요.
▲4차전 끝난 뒤 코치, 구단 관계자들과 어울려서 정말 술 많이 먹었지. 밤새 토할 정도로. 그렇게 이삼일 동안 술만 마시고 지낸 것 같아. 근데 술로 해결하고 잊혀질 문제가 아니더라고. 지난 1월부터 동계훈련에다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와 페넌트레이스를 거쳐 플레이오프와 코리안시리즈까지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거든. 며칠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쉬었어. 아, 근데 TV가 그걸 방해하더구먼. 뉴스를 틀면 여기저기서 한국시리즈 얘기가 나오니 말이야.
―바다에 다녀오셨다면서요.
▲(플레이오프 때 한화전에서) 3연승하면서 너무 기뻤고 (한국시리즈 삼성전에서) 4연패하며 너무 마음이 아팠어. 특히 4차전 끝나고 더그아웃을 빠져나가는데 여성팬들이 울고 있더라구. 그 눈물을 보는 내 마음은 통곡하는 심정이었어. 여행을 다니다 바다를 찾았는데 다른 그림보다도 유독 팬들이 우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바다를 마주보고 앉아 두산이 왜 삼성에 졌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느라 시간을 보냈어.
―왜 졌는데요.
▲그건 내 마음 속의 책에다만 적어 놓으려구. 굳이 얘기하자면 선 감독이 너무 잘했고 아픈 주전들을 대신해서 나온 삼성의 백업멤버들이 살아난 게 우리한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 그쪽은 분위기가 살았고 우린 그 반대였고. 난 져도 4대 빵으로 질 줄은 정말 몰랐어. 대구에서 치른 2차전 때 다 이긴 게임을 동점 주고 연장전에서 엎어졌을 때 선수들이 허탈해 했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거야.
―선동열 감독은 ‘지키는 야구’였고 김 감독은 ‘공격 야구’였는데 내년 시즌부터 ‘지키는 야구’로 바꿔 보실 생각은.
▲나까지 수비 야구를 하면 재미없잖아. 어떻게 보면 선 감독이 맞는 거라구. 확률적으로 보면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김)재박이 형 야구와 (선)동열이 야구만 맞고 내 야구는 틀린 게 아니잖아. 8개팀 감독이 모두 자기 색깔대로 팀을 만들어 나가는 거야. 난 통쾌한 야구를 하고 싶어. 9회에서 4-2로 지고 있다가 쓰리런 홈런 쳐서 맛보는 희열은 1-0으로 막아서 이기는 야구와는 질적으로 틀리거든. 공격야구를 해야 관중이 몰린다구. 아무리 우승 많이 하면 뭐해. 관중들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그래서 번트를 안대겠다고 공언하셨다가 이번 한국시리즈에선 번트가 나오고 그러대요.
▲아무리 좋은 야구를 재밌게 하려고 해도 성적 나쁘면 꽝이더라구. 그래서 번트 열심히 댔어. 그래도 지더라구. 어떻게 해서든 이겨보려고 내 소신까지 버렸는데 건진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후회되데.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보였는데도 계속해서 아픈 질문들만 던졌다. 아마도 대답하는 사람의 솔직함에 살짝 기댄 탓이 크다. 처음 맥주를 마시다 소주로 잔을 바꾼 김 감독의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면서 또다시 ‘송곳’들을 들이댔다.)
―어느 기사를 보니까 선 감독과의 기 싸움에서 졌다고 표현했던데 동의하나요.
▲진 데 대해선 이유가 없어. 토 달면 안 되는 거야. 선 감독의 장점은 인정하고 싶어. 야구를 잘했던 사람이 지도자로서 자기의 선을 확실히 하며 리더해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거든. 선 감독은 자기 선을 확실히 지키더라구. 스타플레이어도 말보단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해. 그런 점에서 선 감독은 일본에서 배운 대로 자기 소신이 분명해 보였어.
▲ 3년 안에 꼭 우승하고 싶다고 속내를 밝힌 김경문 감독. 곰 같은 그 뚝심으로 우승 꿈을 이뤄내지 않을까. | ||
▲선 감독뿐만 아니야. 어떤 인연을 가진 감독이라고 해도 지도자로 만나면 어려워져. 자기 갈 길이 바쁘니까 이겨야 되고, 어떻게 해야 하고. 그래서 좋았던 사이도 서먹서먹해지는 거야. 이기는 쪽은 당연하고 지는 사람은 섭섭하고.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인터뷰를 해서도 안돼. 조용히 왔듯이 떠날 때도 조용히 가는 거야. 언제 잘릴 지 알 수 없는 몸이니까.
―왜 감독이 되고 싶었나요? 선수 은퇴하고 자연스런 수순이었겠죠.
▲그건 선수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운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지도자에 대한 꿈이 생겨. 지도자까지 가봐야 운동생활을 완전히 은퇴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우여곡절 많았던 선수생활을 10년째하고 그만뒀거든. 코치도 10년을 목표로 뒀어. 10년 동안 내 위치 못 찾으면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데로 가려고. 그러다 10년째 됐을 때 선동열 감독 데려오려다 안되는 바람에 운 좋게 나한테 기회가 생긴 거지.
(김 감독은 선 감독이 오려 했던 자리를 자신이 운 좋게 앉게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게 의외였다. 그는 한 마디로 ‘남자답게’ 솔직했고 ‘남자답게’ 성격이 화끈했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하는 목소리까지도 말이다^^.)
―겉으론 온화해 보여도 은근히 예민하고 한번 폭발하면 주위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하던데요? 시즌중에 더그아웃에 있는 정수기를 박살내셨다면서요.
▲정수기 사건 말이야? 심판도 인간이니까 오심을 내릴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한두 게임 때문에 순위가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면 뼈에 사무치거든. 그럴 때 벌어진 일이었어. 더그아웃이 아니라 씩씩거리며 감독실로 걸어가는데 통로에 물통이 보이더라구. 너무 열이 뻗쳐 선수들 안 볼 때 그거 한 번 차봤는데 그새 소문이 새나갔네.
―언론 플레이를 통해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대신 전달한 적이 있었나요.
▲이름을 거론해서 좀 미안하지만 홍원기는 한때 5개팀에서 트레이드 요청을 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감독 입장에선 착한 선수보다 성깔 있어도 야구 잘하는 게 중요하거든. 왜? 성적이 내 밥줄이니까. 지난 8월 나왔던 홍성흔을 1루수로 보낸다는 얘기도 의미가 있는 메시지였어. 난 홍성흔을 참 좋아해. 자세가 너무 좋아. 그런데 내가 심심해서 홍성흔을 1루로 보내겠다고 했겠어? 포수는 서른 살 넘어가면 무릎이 아파서 앉아 있기가 힘들거든. 난 2~3년 후를 본 거야. 그때 가서 배우지 말고 미리 배워두라고. 그래서 선수 생활 오래하라고.
(포수를 천직으로 알았던 홍성흔 입장에선 김 감독의 1루수 전향 메시지는 분명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김 감독은 홍성흔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선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길 바랐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는 홍성흔의 요청으로 더 이상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재계약하셨잖아요. 2억원의 연봉이 갖는 의미가 뭔가요.
▲구단에서 내가 상처받은 걸 느낀 것 같애. 내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고심했던 거지. 돈 액수가 문제가 아냐. 지난 연봉 똑같이 받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거든. 단 재계약을 했다는 사실이야. 난 이렇게 많이 받게 될 거라고 생각 못했어. 그러다가 파격적인 액수를 제시받으니까 프라이드가 생기더라구. 면목도 생기고. 더 잘해야지. 좋은 팀 만들어 달라고 구단에서 믿어준 거니까.
―3년 안에 꼭 우승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3년 안에 또 이루고 싶은 일 없나요? 뭐, 사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요.
▲우승 말고 또 이루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난 우승만 하고 싶은데…. (이때 옆에 있던 두산 홍보팀의 김태룡 부장이 ‘연구 많이 해오셨네’라며 웃자 김 감독이 속사포처럼 이렇게 토해낸다) 3년 안에 우승하고 그 다음엔 내 인생을 새롭게 찾고 싶어요. 그렇게만 말 할게. 이해해 줄 수 있죠? 여기서 프라이버시를 밝히긴 곤란해.
끈질김 덕에 그 ‘프라이버시’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지만 김 감독이 우승팀 만들 때까진 소개하는 걸 잠시 ‘보류’해 두기로 했다. 그의 소원이 3년 안에 다 이뤄진 다음 취중토크 자리가 마련되면 프라이버시 인터뷰를 해야겠다. 물론 김 감독이 오케이해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