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간 재산범죄 면책 악용 혼인신고까지…피해자 충격으로 지난달 생 마감
막장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사기행각은 현실에서 일어났다. 2013년 7월 사기행각의 주범인 이 아무개 씨(여·62)가 피해자 A 씨(81)의 앞에 나타나 자신을 의료재단 이사장이라고 소개했다. 그 후 이 씨는 A 씨의 집을 드나들며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말벗을 자처하며 A 씨의 호감을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가 A 씨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A 씨는 본인보다 스무 살가량 어린 여성이 호의를 베풀자 쉽게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또 A 씨는 치매 증상으로 판단력이 흐린 상태였다. 그는 부인과 사별을 한 데다 자녀들은 미국에서 분가해 살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씨는 A 씨에게 유류분 청구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본심을 드러냈다. 실제로 A 씨는 예전부터 부친의 상속재산을 받기 위해서 형제들과 유류분 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2013년께 있었던 대법원 판결에서도 A 씨는 패소한 상태였다고 한다.
영화 ‘야관문’ 스틸 컷.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A 씨는 이 씨가 하라는 대로 ‘모든 재산을 양도한다’는 내용의 유언장과 양도증서를 만들었고 이후 이 씨의 재산 강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씨는 A 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여생을 돌봐주겠다는 말과 함께 2014년 1월에는 혼인신고까지 감행했다.
이 씨는 유언장과 양도증서를 작성한 직후부터 A 씨의 재산을 가로채기 시작했다. 가로챈 재산 중에는 A 씨의 서울시 종로구 소재의 자택과 토지, 경기 광주시와 충북 진천군 일대의 토지와 해외펀드 등이 있었다. 지난 2013년 11월부터 2014년 3월까지는 펀드를 매각하기 위해 치매 증상이 심해진 피해자와 함께 미국에 가기도 했다.
이 씨가 A 씨의 부동산과 펀드를 판 뒤 34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매수한 기록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4년 4월께 본인 명의로 전북 완주, 경기 용인·화성 일대의 토지와 서울 동대문구 소재 아파트를 매입한 것. 또 이 씨는 자신의 딸과 아들 명의로 각각 경기 용인 소재 아파트를 매입했다.
1년쯤 지나 대부분의 재산을 손에 넣자 이 씨는 A 씨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A 씨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이혼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 것. 이 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A 씨는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2014년 11월 이들은 이혼했다. 그렇게 이 씨는 A 씨의 재산을 챙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거액의 재산이 빠져나가는 동안 A 씨의 자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A 씨의 자녀들은 A 씨와의 왕래가 드물어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씨는 범행을 벌이는 동안 A 씨의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를 여러 차례 바꿔 아예 자녀들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 이 씨는 A 씨에게 “자녀들이 연락하는 이유가 A 씨의 재산 때문”이라며 이간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 씨의 말만 듣던 A 씨의 자녀들에 대한 불신이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A 씨는 분통을 터뜨리다가 지난 2월 중순 생을 마감했다. A 씨의 담당의사에 따르면 이 씨를 만나기 전에는 치매 증상이 초기라서 심하지 않았지만 이 씨를 만나는 동안, 그리고 사기 사실을 안 이후부터 급격하게 중증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A 씨의 자녀들은 이 씨를 상대로 한 소송을 알아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 씨가 A 씨와 혼인신고를 했던 터라 ‘친족상도례’가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친족상도례는 친족 간 재산죄의 형을 면제하는 규정이라 이 씨를 처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경찰은 이를 다르게 봤다. 지난 15일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A 씨의 재산을 편취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등)로 이 씨를 구속입건했다. 경찰은 이 씨와 A 씨의 혼인 신고는 위장결혼에 불과하기 때문에 친족상도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검거 당시 이 씨는 A 씨의 재산으로 매입한 동대문의 한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주거지에서는 명품가방과 고급 양주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씨와 동거하던 공범인 또다른 이 아무개 씨(77)도 불구속입건됐다.
공범 이 씨는 주범 이 씨가 A 씨와의 위장결혼을 위한 혼인신고를 할 때 증인으로 서명했으며 외국펀드를 팔 때 동행하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도 오 아무개 씨(61)도 공범으로 불구속입건됐다. 게다가 이들 사기단은 이전에도 사기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다. 과거 한 여성에게 접근해 2억 원을 편취했던 것. 이들은 신고하려는 피해자에게 “신고하면 너도 공범이 된다”며 협박을 했다. 당시 주범 이 씨와 공범인 이 씨는 사기행각을 위해 부부행세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A 씨가 재산이 많은 데다가 치매에 걸려 판단이 흐려진 상황에서 범행의 표적이 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재산범죄에서 친족의 경우에는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받기 위해 위장결혼까지 하는 등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며 “재력가에게 접근해 위장결혼을 하고 돈을 뜯은 조직적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
꽃뱀사기사건 피해자는 누구? 국내 유명 병원 장남으로 확인돼 취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A 씨가 국내 유명 병원을 설립한 원장의 장남인 것이 확인된 것. A 씨의 부친은 해당 병원을 설립해 수십 년 동안 운영했었고 현재는 A 씨의 동생이 원장을 맡고 있다. A 씨에게는 형제, 자매가 여럿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형제들과 상속 재산을 두고 소송까지 벌였다. 이번 사기 사건 역시 A 씨가 형제들과 유류분 청구소송을 벌여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한 것이 그 시작점이었다. 해당 병원은 국내 의학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병원을 설립한 A 씨 부친은 생전에 5분 이상 하는 이발소에는 가지 않았고, 병원 개원 기념행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금기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장남인 A 씨는 병원 관련 일을 한 적도 없었고 병원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 씨의 부친은 병원사업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했다. 이에 A 씨는 병원이 아닌 다른 사업체를 물려받아 큰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 인해 A 씨는 90억여 원에 상당하는 큰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꽃뱀 일당’의 이 씨가 A 씨에게 접근한 것은 A 씨가 형제들과 재산 소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A 씨의 부친은 의학업계에 지대한 공을 세웠을뿐만 아니라 검소한 성품으로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A 씨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은 상속권 소송을 벌였고 결국 이는 A 씨가 엄청난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의학계 관계자들은 “A 씨 부친은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대한민국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며 “가족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 매우 안타깝다”고 전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