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있듯이 남쪽에서 북으로 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온 사람도 있고 호기심에 월북한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북한 당국자는 그에게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불공평한 모습을 글로 써보라고 했다. 그는 글을 썼다. 그러나 매번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하느냐고 핀잔을 받았다.
점차 시간이 가면서 반짝 친절이 식어가고 있었다. 아파트와 일자리를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당에서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은 것 같았다. 도로 남조선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판문각을 통해 다시 남으로 내려오기 한 달 전쯤이었다. 북한 당국자는 가기 전에 치과치료는 받고 가라고 했다. 그들은 무상 의료복지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치과에 가서 진료의자에 누웠을 때였다. 틀니를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남은 이들을 뽑아버려야 했다. 막 발치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북한의 치과의사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네다. 여기는 마취제가 없습네다. 조금만 참으시라우요.”
치과의사는 생 이빨을 뽑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그가 고문을 한다고 소리치며 비명을 지르자 북한의 치과의사는 화를 냈다. 반죽음이 된 그는 잇몸만 가지고 한동안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본이 잘못 떠져서 틀니를 만드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화가 받친 그는 한번 초대소의 여자에게 “X년”이라는 욕을 했다. 그 말에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 나라가 조선의 종놈과 X년이 세운 나라인 걸 모릅네까?”라면서 덤벼들기도 했다.
판문각을 통해 다시 내려오기 전날에야 틀니가 완성됐다. 남한으로 내려오자마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얼마 있지 않아 감방에서도 내쫓겼다. 밥 먹을 데와 잠잘 데가 없었다. 착한 교도관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그는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종교시설에 들어가 있었다.
“가난한 인민의 낙원인 그곳에 계속 사시지 왜 돌아오셨어요?”
내가 그렇게 물어 보았다.
“낙원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거기 가서 보니까 50년 전 우리 1960년대 가난했던 생활 같아요. 옷소매가 기름때로 절어서 반질반질해요.”
가난한 자는 남과 북 어디에도 발 디딜 광장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소망이 있다면 뭡니까?”
나는 그가 추구하는 작은 행복을 알아보고 싶었다.
“단순한 봉사라도 일할 자리와 원룸이라도 얻을 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치의 계절이다. 사람마다 일을 할 자리가 있고 가난하다고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 억울한 일이 없도록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이 정치권의 임무가 아닐까.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