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16강 정벌
▲ 지난 16일 스코틀랜드전서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상적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안정환. | ||
안정환이 23명의 엔트리에 가까스로 승선할 당시만 해도 이런 변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안정환도 히딩크 감독의 오랜 무관심과 냉대에 속앓이를 했던 터라 엔트리 합류 소식에 무덤덤해 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안정환은 주위의 우려와 기대 속에서 자신의 진가를 신명나게 뽐내고 있다.
이번 스코틀랜드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안정환의 골 세리머니. 골을 넣을 때마다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에 입을 맞추며 가슴 벅찬 감격을 전했는데 이 장면을 본 축구팬들은 반지의 사연을 저마다 궁금해 했다.
경기 직후 안정환에게 반지에 대해 묻자 “연애할 때부터 끼던 반지이고 결혼 반지는 불편해서 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아내 이혜원씨로부터 반지의 사연을 보다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프러포즈의 의미로 받았던 반지가 아니다. CF촬영 때 처음 만나 전화통화를 주고받던 중 오빠가 정식 교제를 신청하는 의미로 부쳐온 반지였다. 그때는 진의를 잘 몰라 반지를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고민했었다.”
때는 99년 8월 중순. 스포츠 브랜드 휠라의 카탈로그 모델로 촬영장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0월께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출발선상에 반지가 있었다. 이씨에 대해 큰 호감을 가졌던 안정환은 부산과 서울이라는 지리적인 한계 때문에 자주 볼 수 없게 되자 우선 반지를 장만해 이씨에게 택배로 부쳤다.
그리곤 전화를 걸어 “지금 너에게 반지를 보냈다. 만약 날 만날 생각이 없다면 버려도 된다. 하지만 내 진심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축구선수 안정환이라는 남자에 대해 어떤 확신도, 상세한 정보도 없는 차에 무턱대고 반지부터 보내는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집에 도착한 반지를 직접 받아보고서야 안정환의 진심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지를 보낸 뒤 안정환은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 자리에 이씨는 그 반지를 끼고 나갔다. 물론 안정환의 손에도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여 있었다. 서로의 손에 맞춘 것처럼 묻혀 있는 반지를 보고서야 두 사람은 사랑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씨는 안정환의 최근 두드러진 활약에 대해 “이탈리아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자기는 모르겠지만 유럽 선수들의 경기 스타일이나 습관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면서 자신감을 갖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교적이지 못하며 때론 너무나 솔직해 처음 외국 생활에선 겪지 않아도 될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그런 일들이 안정환에게 강한 근성과 오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이 이씨의 분석이다.
“참 솔직담백한 남자다. 얼렁뚱땅, 대충대충과는 거리가 멀고 거짓말을 못하는 특징이 있다. 결혼 전 이런저런 구설로 우리 가족들이 힘들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걸 다 털어놨고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아 가족들은 감동을 받았다.”
월드컵 이후 팀 이적 문제와 병역문제라는 대명제가 놓여 있는 상태에서 안정환이 맞이하는 월드컵에는 월드컵 이상의 의미와 기대가 담겨 있다.
스페인의 축구스타 라울을 흉내낸 것이든,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든 상관없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타이틀답게 그 멋지고 감격적인 골 세리머니를 자주 볼 수만 있다면 국민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 결혼식에서 장인장모와 함께한 안정환. | ||
안정환이 물 만난 고기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하는데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바로 기도의 힘이다.
아내 이혜원씨 가족들은 독실한 크리스천. 큰외삼촌이 큰 교회의 목사고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도 평소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맡아 혼인 예배로 치렀다. 안정환의 장모 전봉숙씨는 “우리 교회와 혜원이 외삼촌 교회에서 월드컵의 성공과 안정환을 위한 특별기도 시간이 따로 마련됐다. 수만 명 신자들이 마음을 다해 안정환의 부상과 건투를 빌며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부진했을 때도, 월드컵 엔트리 합류가 불확실했을 때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씨가 다니는 교회에선 전도대회에서 1등하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안정환이 직접 사인한 축구공을 선물로 주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인기 폭발이었다고. 이번 스코틀랜드전을 앞두고도 열심히 새벽 기도에 참가했다는 전씨는 담임목사가 부상으로 고생하는 사위를 위해 특별 기도를 마련하는 걸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으며 외롭게 자라난 사위가 교인들의 기도를 통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기에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결혼시킨 직후 ‘미스코리아 엄마’에 대한 세간의 편견으로 여러 번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사위의 장래와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욕먹는 것쯤은 꾹 참았던 배려가 눈에 띈다. 다행히 안정환의 플레이가 살아나면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조금씩 보상되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고.
스코틀랜드 경기 직후 안정환이 아내와 장모에게 전화를 걸어 “잘 참고 기다려줘서 정말 고맙다”고 떨리는 목소리를 전할 땐 딸도 그도 눈물을 쏟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람이다. 그런 점이 좋아 결혼을 승낙했는데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있다. 잘나갈 때보다 어려울 때 더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정말 하늘에서 맺어준 짝이란 생각이 든다. 성적에 관계 없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안서방 파이팅!”
사위에 대한 진한 믿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장모의 사랑 고백이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