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 영역 다툼서 꼬리 내려 ‘검투사 별명이 무색’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ISA 출시와 관련해 은행에도 투자일임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ISA의 뚜껑을 열어보니 투자일임으로 가입한 고객은 소수에 불과해 금융투자협회와의 밥그릇 다툼이 무색해졌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른바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ISA 출시를 한 달여 앞두고 있던 지난 2월 초,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과 하영구 한국은행연합회장 사이에 영역 다툼이 벌어졌다. ISA 시장에 향후 100조 원이 넘는 시중 자금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자 하 회장이 갑작스럽게 “은행에도 투자일임업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투자 일임’이란 금융회사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자유롭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투자에 나서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고객 대신 주식종목 등을 골라주는 방식으로 증권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반면 은행은 ‘신탁’이 주력이다. 투자 포트폴리오는 고객이 직접 만들고, 은행은 고객의 돈을 맡아두고 있으면서 투자주문만 대행해주는 방식이다.
하영구 회장이 그동안 은행과 증권사들이 서로 고유영역으로 인정해 왔던 분야를 침범하겠다고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행 자본시장법대로라면 특정 은행 예금 가입자는 그 은행이 취급하는 ISA에는 예금 상품을 편입해 넣을 수 없다.
쉽게 말해 A 은행에 100만 원의 예금이 있더라도 ISA에 가입할 때는 A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을 통해야 한다. 은행은 투자일임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인데, 고객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은행 입장에서는 얻는 것이 없는 구조인 셈이다. 반면 증권사는 투자일임업이 가능하기에 자신이 취급하는 ISA에 자신의 상품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런 맹점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권을 대표하는 하 회장이 총대를 메고 나오자 증권업계에서도 황 회장이 맞대응에 나섰다. 황 회장은 지난 2월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하 회장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은행에 일임업을 허용하는 것은 금융투자업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며 국가 전체의 금융시스템에 부담을 주는 일”이라며 “투자일임업은 금융투자업계에 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또 “우리나라에서 은행은 원금이 보장되는 안전한 금융기관이라는 인식이 있다”며 “은행은 운용 전문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투자상품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손실이 났을 때 고객의 민원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은행은 투자일임업에 나설 능력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고객들을 향해서는 ‘은행에 맡기면 손해를 볼 것’이라고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왼쪽)이 ISA와 관련 은행연합회와의 영역 다툼에서 꼬리를 내리면서 ‘검투사’라는 별명이 무색해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황 회장의 날선 공격은 불과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2월 중순 다시 한 번 기자들을 불러 모은 뒤 “국민재산 늘리기라는 ISA 제도의 취지를 고려해 대승적 차원에서 투자일임업을 ISA에 한해 은행에 허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지점과 영업망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은행이 공격적으로 ISA를 영업할 경우 자금 쏠림의 우려가 있지만 금융투자업계가 투자일임에 오랜 경험과 전문성이 있어 경쟁력이 충분할 것으로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ISA의 흥행몰이와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통 큰 양보를 했다는 설명이지만 결론은 증권사들의 핵심 고유영역인 투자일임업을 은행권에 내줬다는 얘기였다.
증권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특히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허무하게 물러선 황 회장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한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가뜩이나 업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마당에 밥그릇마저 나눠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며 “검투사라던 황 회장이 칼도 못 뽑아보고 꼬리를 내린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증권업계가 황 회장의 양보에 불만을 갖는 이유는 은행권의 막강한 영업망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2월 말 기준으로 은행권의 지점망은 총 7300개, 펀드 판매 인력은 9만 3000명에 이른다. 반면 증권사는 지점 1200여 개, 펀드 판매 인력 2만 300여 명에 그친다.
증권사들의 이런 우려는 ISA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현실로 나타났다. ISA는 지난 3월 14일 판매 개시 후 1주일간 총 65만 명이 가입했는데, 이 가운데 은행을 통해 가입한 고객이 61만여 명으로 90%를 훨씬 넘는다. 증권사를 통해 가입한 사람은 4만 명 수준에 머물렀다.
가입 금액에서는 그나마 증권사가 선전했다. 출시 후 1주일간 ISA 가입 금액은 총 3200억 원가량. 이 중 은행이 2000억 원가량으로 60%를 넘었고 증권사를 통한 가입액은 37%를 수준인 12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금액이나 고객 수보다 증권업계와 황 회장이 더 아파하는 부분은 가입 유형이다. 이 기간 가입한 ISA 상품유형을 보면 신탁형이 3140억 원(98.1%)가량으로 60억 원 수준에 그친 일임형을 압도했다.
게다가 현재는 일임형을 증권사에서만 판매하고 있다. 은행은 금융당국의 허락만 받았을 뿐 정식으로 일임업을 등록하는 절차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판매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황 회장이 업계를 대표해 싸움에 나서며 지키려 했다가 자존심까지 구긴 상품이지만 정작 증권사에서 일임형을 가입하는 고객들은 거의 없는 셈이다.
황 회장은 이런 현상에 대해 “좀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그는 “증권사들이 ISA 마케팅을 위해 내놨던 특판 상품들이 일임형 ISA에 편입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특판 상품 가입 기간이 끝난 후에는 증권사를 통한 일임형 ISA의 가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증권사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오는 5월 ISA의 투자수익률이 공개되면 일임형 ISA의 가입은 늘 가능성이 있지만, 고객들이 증권사를 이용할지는 미지수라는 이유에서다.
금융권의 한 영업담당 임원은 “계좌이동제 등이 실시됐다고는 해도 고객들은 계좌를 만든 곳에서 상품을 가입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은행들이 1만 원짜리 ISA 계좌라도 일단 가입시키고 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면서 “고객 머릿수 채우기에서 앞선 은행권이 유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영복 언론인